사촌 오빠를 떠나보내며...
그제, 사촌 오빠는 고통으로 무거웠던 육신의 껍질을 벗고 자유의 몸이 되셨다.
병문안을 다녀온 후 불과 일주일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황망하고 믿기 어려웠다. 출근을 준비하던 아침나절, 갑자기 전해진 소식에 슬플 겨를도 없이 정신없는 일과를 보내고서야 썰물처럼 잠시 밀려났던 슬픔이 다시 밀려왔다. 저녁 어둠 속에서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 가로등 불빛들이 오늘따라 유독 빛 번짐이 심한 것 같았다. 어느샌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며 애써 도착할 때까지는 오빠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작은 집 세 딸들은 큰 집의 맏이였던 사촌오빠의 손을 잡고 모두 결혼식에 입장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결혼 당사자였던 나보다 잡은 손을 더 떨던 오빠를 아직도 기억한다. 어머니와 함께 부모님 석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의 기제사 때마다 찾아와 삼촌과의 추억을 얘기하던, 명절 때마다 매제들과 술 한잔 후 당구장 가는 것을 재미로 삼던, 늘 무뚝뚝하지만 정겨웠던 오빠였다.
익숙한 사람들과 낯선 사람들이 뒤섞인 장례식장, 복도를 따라 늘어선 화환들, 풍경은 같으나 여느 장례식장과는 다르게 선뜻 입구에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여졌다. 영정 사진 속 오빠를 차마 볼 자신이 없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쪽잠을 자며 병간호를 했던 새언니는 하얀 머리가 더 하얗게 새어 있었다. 투병과 임종을 지켜보면서 누구보다 먼저 죽음을 받아들여서인지 염려했던 것보다는 편안한 모습인 것 같아 다행이었다.
오빠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배웅하고 싶어 다음날 새벽, 출상에 참석했다. 죽음으로 삶을 영위하는 장례지도사는 마치 하나의 공정처럼 순차적으로 막힘없이 발인제를 진행했다. 관이 들여오고 침묵 속에 진행되던 제는
가까운 친적들과 예닐곱명의 살아생전 오랜 술친구들이 마지막 절을 모두 올릴 때쯤,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시작되었다. 상주였던 둘째 조카의 주체할 수 없는 격한 흐느낌이 전염병처럼 그 자리에 섰던 사람들에게 옮겨지는 듯했다. 그렇게 오빠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오빠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새언니가 누가 누가 병문안을 왔었다는 말을 하고 난 뒤였다.
"오빠 참 잘 살았다. 참 잘 살았어..." 지나고 나니 이 말을 오빠에게 해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임종을 맞을 때도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면 좋을 것 같다. 참 잘 살았다고, 참 열심히 잘 살았다고.
지금은 작고하신 이청준선생님이 죽음을 '축제'로 승화했듯, 이 나이가 되고서야 축제에 진정 동참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빠가 죽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오빠의 축제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즐거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