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

by 반디

초등학교 6학년때였던 것 같다.

매주 제출하던 일기장을 평소처럼 제출했는데 다음날 담임선생님이 방과 후에 조용히 부르셨다.

'Y야,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니?'

'...'

죽음에 관한 온갖 질문들을 쏟아 놓은 일기장을 보신 후였다.

대답 없는 내게 선생님은 이번 주말에 괜찮으면 만나자고 하셨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고 약속 시간에 선생님과 만났다. 본인이 다니시던 교회로 나를 데려가셨다. 다들 해맑게 반겨 주었고 '죽음'이라는 단어와 시름하고 있던 나만 상반되게 죽을 상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찬송가와 사명처럼 웃고 있는 이들은 죽음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 같았다. 어린 나이여서 그랬겠지만 그곳에서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가난으로 제대로 된 병원 진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아버지는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렇게 소원하던 입원 한번 해 보지 못하고 고통으로 신음하며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셨다. 4남매를 키워내셔야 했던 어머니는 죽은 사람보다 살아갈 사람이 중요했다. 당연히 무덤은 고사하고 화장한 재를 뿌릴 곳도 마땅찮아 화장장 한편의 나무 그루터기에 훠이 훠이 뿌렸던 장면을 기억한다. 당시에는 낯설었던 죽음이 왜 불현듯 삼년이나 지난 시점에 물음표가 되어 되살아 났는지는 모르겠다.

어느덧 결혼식보다는 상갓집에 갈 일이 더욱 많아진 나이다. 그저 그런 격려와 그저 그런 부조금으로 성의를 표했다. 죽음에 대해서도 세월이 흐른 만큼 감각이 무뎌졌다. 어제 사촌 오빠의 병문안을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폐암으로 한 달 시한부 선고를 받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투병 중인 오빠였다. 사촌 간의 애틋한 정보다는 통과의례처럼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뵈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우선이었다. 깐깐한 면회 절차를 마치고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잊은 줄 알았던 '죽음'이 강풍처럼 강렬하게 휘몰아쳤다.

뇌까지 전이된 탓에 시력까지 잃고 허우적 대는 오빠의 모습은 마치 꼭두각시처럼 누군가의 조종이 있어야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았다. 이름 모를 진정제와 진통제로만 금식으로 뼈마디만 남은 육체를 지탱하고 있었다. 오직 청각에만 의존하여 삶의 마지막을 붙들고 있었다. 작년 추석, 투병 중이었지만 제법 앉아서 얘기를 나눌 정도의 건강한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기에 일 년 사이에 벌어진 인지 부조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섬망 증상으로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의식만 있으면 '집으로 가자'라고 한다며 새언니는 못내 눈시울을 붉혔다. '집으로 가자...' 당장이라도 오빠를 둘러업고 집으로 데려다주고 싶었다. '그래 오빠,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 병원으로 그렇게 가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와 집으로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오빠. 죽음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초등학교 때처럼 죽음에 관한 물음이 스멀스멀 또다시 올라왔다. 이제는 타인의 죽음이 아닌 나의 죽음에 관하여.

죽음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브레이크 오작동으로 인한 허망한 죽음, 고의적인 살인에 의한 죽음, 순간의 격정을 이기지 못한 죽음,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한 죽음, 타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죽음, 육체를 잠식하는 병으로 인한 죽음, 자연재해로 인한 예기치 못한 죽음,... 뉴스에서 연일 보도되는 죽음의 모습은 너무도 다양하다. 마치 죽음에 관한 경우의 수가 어디까지인지 보여주듯이.

어제부터 다시 던져진 죽음에 관한 질문은 오늘도 종일 나를 괴롭히고 있다. 답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저 자연이라는 집으로 우리 모두는 돌아가리라는 것을 알 뿐이다. 아파트 베란다 너머 먼산과 하늘을 유독 자꾸 올려다보게 되는, 한없이 겸손해지는 오늘이다.

keyword
이전 07화미안하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