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받은 시간 명절

by 생각의정원

어린 시절 추석은 하나의 우주였다. 엄마, 아빠, 남동생, 그리고 나. 우리 가족 네 명이 함께 떠나는 자양동 고모집에서 시작해서 고양시 외할머니 댁으로 이어지는, 하루 종일 계속되는 긴 여행.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부터가 특별했다. 평소라면 일어나기 싫어했을 텐데, 추석 아침만큼은 달랐다. 뭔가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온몸이 알고 있었으니까.


자양동 고모집은 첫 번째 정거장이었다. 2층 단독주택이었는데, 그 집에서 가장 신기한 건 지하실에 있던 양말공장이었다. 그땐 몇 없던 시절이라 더욱 특별해 보였다. 기계들이 돌아가는 소리, 실이 엮어져 양말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법을 보는 것 같았다. 고모가 차려주신 아침 상을 받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드리는 것. 그리고 꼭 추석날이면 할머니와 고모네는 거실에서 씨름과 전국 노래자랑을 보고 계셨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단순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하나의 의식이었다. 가족이라는 끈을 확인하는.


그리고 고양시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느꼈던 그 설렘은 뭐였을까? 단순히 외할머니를 만난다는 기쁨이었을까, 아니면 뭔가 더 큰 것에 속해있다는 안도감이었을까?


외할머니 댁에 도착하면 집 안이 북적거렸다. 외할아버지의 온화한 미소, 삼촌과 숙모의 반가운 인사, 그리고 친척 동생들과의 재회. 반년에 한 번, 이 날만을 위해 모이는 사람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평소에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추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곳에 모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


외할머니는 항상 같은 말씀을 하셨다. "또 컸네, 또 컸어." 나는 그때 그 말이 지겨웠다. 당연히 컸을 텐데 왜 매번 같은 말씀을 하시지?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말 속에 담긴 시간의 무게를. 반년이라는 시간이 어린아이에게는 얼마나 긴 변화의 시간인지를.


친족 동생들과 뛰어놀던 마당, 삼촌이 들려주시던 재미있는 이야기들, 숙모가 몰래 챙겨주시던 용돈. 모든 것이 특별했다. 왜냐하면 반년에 한 번뿐이었으니까.


그때는 그것이 영원할 줄 알았다. 매년 추석이 오면 당연히 그 집에 가고, 당연히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시간이 멈춰 있을 거라고.


하지만 시간은 흘렀다. 외할아버지가 먼저 가셨고, 외할머니도 따라가셨다. 삼촌과 숙모도 이제는 만나기 어려워졌다. 친척 동생들도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고양시 그 집도 이제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추석은 예전과 다르다. 여전히 가족들과 만나지만, 그 우주 같던 하루는 없다. 아무래도 어른이 되면서 추석의 의미가 바뀐 것 같다. 예전에는 받는 날이었다면, 지금은 주는 날에 가깝다.


그런데 가끔, 정말 가끔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자양동에서 고양시까지 이어지던 그 긴 하루가.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서 웃고 떠들던 그 시간이.


나는 그때를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대신 '선물받은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린 나에게 주어진, 가족이라는 것의 따뜻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


지금도 추석이 되면 생각한다. 어디선가 외할머니가 여전히 "또 컸네" 하고 말씀하고 계실 것 같다고. 외할아버지가 여전히 온화하게 미소 짓고 계실 것 같다고.


그리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추억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 생각한다. 반년에 한 번, 특별한 하루를. 아이들이 커서도 그리워할 만한 따뜻한 시간을.


추석이란, 결국 기억을 만드는 날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 모든 순간들이 소중한 기억이 되어 있다.


자양동 고모집의 아침 상, 고양시로 향하던 차창 밖 풍경, 외할머니 댁 마당에서 뛰놀던 오후, 하루 종일 이어지던 인사와 만남들. 평범해 보였던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인다.


어쩌면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어린아이가 추석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설레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도 언젠가는 지금의 나처럼 그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서야 깨달을 것이다. 추석이 단순한 명절이 아니라 '시간'이었다는 것을.


흘러가버린 시간이지만, 사라진 시간은 아니다.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는 시간.

그것이 추석이 내게 남겨준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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