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 헝가리 역대 수도 투어… 호젓한 브라티슬라바성과 UFO다리
부다페스트에 더 묵고 싶었지만,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기다리는 친구가 있었다. 마음이 괜히 조급하다. 체코 프라하 가는 길에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가 있는데 인기 있는 여행지는 아니다.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슬로바키아(Slovakia)가 아홉 번째 여행국가가 됐다.
관건은 여행루트. 부다페스트에서 브라티슬라바(Bratislava)로 가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국제열차(Inter-Rail)였다. 다만 비싸다. 1998년 당시 양 도시를 연결한 인터레일 티켓은 미화로 90달러 정도였다. IMF 외환위기 시절을 감안하면 한화로는 10만원이 한참~ 넘는 돈이었다.
게다가 나름 ‘동유럽토박이’ 여행객에겐 너무 평범한 루트였다. 몰도바에서 콘스탄차로 이동할 때처럼 현지 교통수단을 알아봤다.
호스텔 직원(그 호객꾼)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브라티슬라바를 어떻게 가니?”
눈이 동그래졌다. 몇 차례 의지를 확인하더니,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한다.
27년 전 부다페스트에는 4개의 기차역이 있었다. 두 곳은 국제선, 다른 두 곳은 국내선. 어제 도착한 국제역이 아닌 국내역에서 출발, 에스테르곰(Esztergom)에서 배로 다뉴브강을 건넌다. 이어 슬로바키아 슈투로보(Štúrovo)에서 버스로 기차역, 기차로 브라티슬라바를 가는 코스다.
약간의 설렘과 긴장이 묘한 도발의식을 갖게 한다. 버스를 타고 역에 도착해서 에스테르곰행 티켓을 끊었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역 주변은 한산했다. 1시간 정도 달린 뒤 에스테르곰에서 내린 승객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걸어간다. 한 여름 뜨거운 태양이 작열한다. 따라나섰다.
부다페스트 북서쪽 50km에 위치한 에스테르곰은 헝가리 초대 국왕 이슈트반 1세가 대관식을 치른 곳이고, 아르파드왕조의 수도였다. 다뉴브강을 낀 국제도시로 번성했으나, 몽골에 의해 궤멸적 피해를 입고, 수도를 부더(부다페스트)로 옮긴 뒤로는 가톨릭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아직 이른 시간. 인적은 뜸하다. 대문을 드나들며 신나게 뛰어놀던 아이들이 낯선 이방인의 등장에 일제히 쳐다본다. 이런 시선을 즐기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다른 여행객들에 섞여서 아담하고 좁은 길들을 걷다 보니 에스테르곰이 단아하고 깊이 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에스테르곰의 다뉴브강변은 깔끔한 부다페스트와 달리 나무들이 자연 그대로 무질서하게 늘어선, 정말 ‘자연’스러운 곳이었다. 50센트를 내고 티켓을 샀다. 세관 통과가 먼저였는지, 티켓 구매가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괘념치 않은 분위기였다. 세관이 먼저였을 것 같다.
빠르게 세관을 통과한 뒤 선착장 내부 매점에서 생수를 사려고 하는데, 여직원인지, 주인인지,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선호하지 않은 화려한 보디랭귀지까지 선보였으나 당황스러운 표정만 짓는다. 그러다가 러시아말로 “voda” 하니, 반갑게 “voda!” 하며 직접 물을 따라준다.
선착장에서 배에 올라 에스테르곰 대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컷 찍었다. 그 때는 에스테르곰 대성당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사진과 자료를 비교한 뒤에야 알게 됐는데, 그렇게 유명한 곳인지 알았으면 한 번 들러볼 걸 하는 생각도 든다. 기회가 있겠지. 있을까.
배는 천천히 강을 건넜다.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슬로바키아 강변에 도착한 뒤 오솔길을 걸어 세관에 도착했다. 세관직원이 신기한 눈으로 한참 뭐라고 말하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대충 “투어”라고 말하니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7월 23일 자 입국 도장을 찍어준다.
버스로 기차역까지 간 뒤 브라티슬라바행 티켓을 끊고 열차에 올랐다. 부다페스트에서 에스테르곰까지 2달러, 다뉴브강을 건너는데 50센트, 슈투로보에서 버스와 기차로 브라티슬라바에 도착하는 데 쓴 2달러를 합치면 4달러 50센트. 이 여행기를 쓰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얼마를 달렸는지 어느새 브라티슬라바역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더 단출했다. 간단한 시내 소개가 있는 책자를 활용했는데, 브라티슬라바성 말고는 추천 관광지가 없다시피 했다. 미카엘 게이트(Michael's Gate)와 구시가도 본격적인 관광상품화 이전이나 매우 초기단계였던 것 같다. 유스호스텔 직원은 “볼 것도 없는데, 성을 뭐 하러 올라가느냐”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브라티슬라바 나름의 멋이 있다. 빈, 프라하, 부다페스트 같은 쟁쟁한 이웃 나라 수도들과 비교할 때 화려함과 명성은 크게 떨어지지만, 부슬부슬 흩뿌리는 빗방울 사이로 보이는 이 호젓한 도시는 동유럽 특유의 은은하고 시크한 매력을 매우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브라티슬라바성에서 내려오는 도중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유럽의 비는 우리나라처럼 많은 양을 쏟아내지는 않는다. 여간한 비 아니면 우산도 보기 힘들다.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은 비 맞기 싫다. 높다란 브라티슬라바성벽 옆에서 요리조리 피해봤지만, 지붕이 없었다. 성벽 옆 구시가에도 마땅한 카페나 레스토랑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지켜보다가 그냥 맞기로 했다.
길 건너 브라티슬라바성 맞은편에는 성 마르틴 대성당(St. Martin's Cathedral)이 있다. 1536년 이후 헝가리왕국의 수도였던 브라티슬라바를 대표하는 성당이다. 1783년 부다페스트 환도 후에도 1830년까지 국왕 대관식은 여기에서 열렸다. 음악가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을 초연한 곳이라는 설이 있는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곡의 초연이 이뤄졌다는 말도 있다.
참고로, 에스테르곰은 960년 이슈트반 1세의 아버지가 자리 잡은 후 사실상 헝가리왕국의 첫 수도였다. 이슈트반 1세는 1000년 교황으로부터 국왕으로 승인받아 아르파드왕조를 열었다. 몽골군이 전 국토를 초토화하자 1256년 벨러 4세는 부더로 천도했고, 오스만제국이 부더 인근을 점령하자 1536년부터 브라티슬라바가 247년의 기간 동안 망명수도로 역할을 한 셈이다.
성 마르틴 대성당 옆으로 ‘흘라브네 나메스티에(Hlavné námestie)’가 이어진다. 대관식을 마친 국왕과 왕비 행렬이 시민의 환호 속에서 광장을 지났다. 1945년 4월 4일 브라티슬라바가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된 날을 기념해서 한동안 ‘4월4일광장’이라는 별칭을 쓰기도 했다. 1989년 현재 명칭으로 바뀌었지만, 1998년에도 4월4일광장으로 충분히 찾을 수 있었다.
광장과 인근 구시가를 관광하고, ‘UFO타워’로 유명한 민족봉기다리(Most SNP)를 건넜다. 다리 위 전망대를 올라간 것 같지는 않다. 맞은편에서 다리 너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브라티슬라바성 전경을 사진에 담았다.
도심 북쪽 언덕에 위치한 전몰비 슬라빈(Slavín)은 브라티슬라바성을 가기 전에 들렀다. 사회주의 풍토가 강했던 그 시절 훨씬 비중 있는 장소였을 것이다.
여행을 끝낸 뒤 생각하니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한 뒤 에스테르곰을 거쳐서 브라티슬라바로 이어진 이번 여행은 ‘헝가리 역대 수도 투어’였다. 모두 다뉴브강변의 도시들이며, 정치와 종교뿐 아니라 교역과 군사활동의 전략적 중심지였다. 현재 중부 유럽의 주요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는데, 정말 운 좋게 한 세대 정도 빨리 여행한 셈이다. 30주년 기념 여행을 기획해야겠다.
PS. 지금이야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자연스럽게 구분하지만, 1998년만 해도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단일 국가명이 더 익숙했다. 1989년의 ‘벨벳혁명’(신사혁명)에 이어 군사적 마찰 없는 ‘벨벳이혼’으로 1993년 1월 1일 두 개 국가로 분리한 지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슬로바키아 최대도시였다. 헝가리왕국의 수도 시절엔 포조니로 불렸는데, 당시 인구 43만명 정도의 작은 도시였다. 2022년 12월 기준 인구 47만명. 인접국 수도인 오스트리아 빈, 체코 프라하, 헝가리 부다페스트 등과 비교하면 여전히 소도시에 머물고 있다.
하나 더. 배를 타고 에스테르곰과 슈투로보 국경을 통과한 방식은 이젠 경험할 수 없을 듯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딸 마리 발레리(Marie Valerie)의 이름을 딴 다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1895년에 건설됐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파괴된 이후 배로 국경을 넘던 옛날 옛적 이야기다. 2001년에 재건되면서 다시 개통됐다고 한다.
[에스테르곰 MTA] 에스테르곰 대성당(Esztergom Basilica), 에스테르곰성(Esztergom Castle), 마리아 발레리아 다리(Mária Valéria Bridge), 기독교박물관(Christian Museum), 다뉴브 강변 산책로, [인근 도시] 비셰그라드(Visegrád), 센텐드레(Szentendre)
[브라티슬라바 MTA] 브라티슬라바성(Bratislavský hrad), 성 마르틴 대성당(St. Martin's Cathedral), 흘라브네 나메스티에(Hlavné námestie), (구) 슬로바키아 국립극장, 미카엘 게이트(Michael's Gate), 슬라빈(Slavín), 前 이스트로폴리타나 대학교 건물, 레두타 음악홀, 에스테르곰 대주교 궁전(프리메이트 궁전), 민족봉기다리(Most S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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