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루미 선데이’의 도시 부다페스트, 프라하보다 좋았다

[헝가리] 깔끔한 다뉴브강과 세체니 다리… 유스호스텔 국제커플의 즉석만남

by Keeper of HOPE
19980722 Budapest Hungary001.jpg 1998년 여름 부다 쪽에서 바라본 부다페스트 전경. 다뉴브강을 중심으로 깨끗하고 담담한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부쿠레슈티 다음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였다. 룸메이트 대니는 몰도바로 돌아가야 했고, 후배와 교수님은 체코 프라하행 기차에 올랐다. 부다페스트를 경유하기 때문에 같은 열차칸에 탔다. 1998년 7월 22일 오전 일행과 작별한 뒤 여덟 번째 나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역에서 내렸다.


역 앞에는 호객꾼들이 득실득실했다. 개중 인상 좋은 청년이 소개하는 차량에 탑승했고, 뒤이어 잘생긴 백인 청년이 같이 탔다. 물어보니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온 대학생이었다. 영어를 잘했다. 서울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이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카운터에서 같은 방을 배정한다. 침대가 수십 개 놓인 복층구조였는데 층고가 높았다. 2층에 백인 여대생 3명이 있었고, 우리는 유스호스텔 특유의 쾌활한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그중 1명이 스페인 출신이라고 소개하자, 이 아르헨티나 청년이 스페인어를 급 구사하기 시작한다.


샤워하는 사이 새로운 커플은 나가버렸고, 30대 초반 한국인 여성을 만났다. 당시에는 보기 힘든,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에서 유학 중인 누님이었다. 한국에 가본 지 여러 해가 지났다고 했다. 괜히 안쓰러운 마음에 배낭이 무겁다는 핑계를 대고 매운 X라면 10봉지를 건넸다.


참고로, 1918년 건국한 유고슬라비아는 1991년 이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가 독립한 상태였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연방공화국의 코소보전쟁은 5개월째 진행되고 있었다. ‘인종청소’ 이슈가 강해 여행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부다페스트는 다뉴브(도나우)강을 중심으로 오른쪽의 부다와 왼쪽의 페스트로 나뉜다. 언덕과 구릉으로 이뤄진 부다지구에는 과거 왕족과 귀족이 거주했고, 페스트지구는 서민의 주거지였다. 1949년 세체니 다리가 건축되면서 양 지역이 처음 연결됐는데, 이 현수교는 헝가리 귀족이자 개혁자였던 세체니 이슈트반(Széchenyi István)을 기념해서 만들었다. 야경이 탁월하다.


부다를 먼저 들렀다.


모스크바 광장(현 셀 칼만 광장)을 지나서, ‘왕궁의 언덕(Várhegy)’ 구시가(Buda Castle District)로 들어섰다. 부다왕궁과 어부의 요새, 마차시 교회 등이 밀집했는데, 듣던 대로 어부의 요새에서 보는 뷰가 환상적이다. 왕궁 앞에 독수리를 닮은 투룰(Turul)상이 있는데, 헝가리의 국조(國鳥)인 상상의 새라고 한다. 겔레르트 언덕도 부다에 포함된다.


헝가리는 현재 서비스업이 GDP의 40%에 달하며, 부다페스트 관광이 차지하는 몫이 절대적이라고 한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하는데, 1998년 당시에는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때도 세체니 다리와 성 이슈트반 대성당, 다뉴브 강변의 국회의사당과 야경을 제외하면, 유럽 다른 관광지와 비교할 때 특별한 볼거리가 많지 않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많은 여행객이 선호하는 체코 프라하보다 왕궁의 언덕과 겔레르트 언덕에서 바라본 부다페스트를 우선한다. 깨끗하고 넓은 다뉴브강을 가로지르는 세체니 다리와 강변의 국회의사당은 정갈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좋았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대중교통도 다른 도시들보다 짜임새 있게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근 국가 도시와의 접근성도 좋았다.


19980722 Budapest Hungary002.jpg 페스트 쪽에서 찍은 사진인 것 같다. 부다페스트에 대한 인상은 이후 프라하를 여행할 때보다 인상적이었다.


부다를 관광한 뒤 사자상이 유명한 세체니 다리를 걸어서 건넜다. 페스트로 들어와서 5분 정도 더 걸어가면 성 이슈트반 대성당이 나온다. 헝가리왕국 초대 국왕 이슈트반 1세(I. Szent István)를 기념해서 만든 헝가리의 최대 성당이다. 다음 편에 소개할 초대 수도 에스테르곰(Esztergom)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세케슈페헤르바르(Székesfehérvár)라는 주장도 있다.


세체니 다리를 등지고 왼편으로 올라가다보면 코슈트러요시 광장(Kossuth Lajos tér) 옆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시절 만들어진 국회의사당이 나온다. 1902년 개장 이래 현재까지 헝가리에서 가장 거대한 건물이다. 네오고딕 양식으로 건축했는데, 영국 국회의사당 디자인 차용 이슈가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의사당 정면에 주요한 동상들이 눈에 띈다.


다뉴브 강변 벤치에서 강바람을 맞았다. 시원하고 좋다. 널따란 강에 인적은 뜸한데 호젓한 기운이 감싼다. 투박한 자동차들이 거친 소리를 내며 세체니 다리를 지난다. 부다가 높은 곳에서 페스트를 내려다보는 전망이었다면, 페스트는 낮은 곳에서 부다를 올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부다페스트의 ‘위엄’과 동유럽 특유의 ‘잿빛 분위기’가 묘하게 오버랩하는 듯했다.




뵈뢰슈머르치 광장(Vörösmarty tér)과 엘리자베스 광장(Erzsébet park)을 거쳐 데아크페렌츠 광장(Deák Ferenc tér)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부다페스트 지하철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시절인 1896년 개통한 유럽 본토 최초의 도시철도다. 간단한 노선이지만 영웅광장 등 주요 스폿을 요긴하게 연결한다. (세계 최초는 1863년 개통한 영국의 런던 지하철)


데아크페렌츠 광장역 에스컬레이터는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속도가 빨랐다. 게다가 엄청나게 깊다. 가볍게 올라탔다가 깜짝 놀랐다. 이렇게 깊이 내려가려면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겠다, 수긍하면서도 혹시 발이라도 헛디디면 큰일이겠다 싶다. 긴 여정(?)에 주변 사람들은 한국인을 신기하게 쳐다봤고, 그 한국인은 조선시대였던 19세기에 만들었다는 지하철이 마냥 신기했다.


현대식 에스컬레이터를 조선시대에 만들진 않았겠지 하면서 지하철에 오르니 환승 없이 15분만에 영웅 광장(Hősök tere)에 도착한다. 역에서 나오면 도로 건너 바로 광장 정면이 나온다. 보기만 해도 뻥 뚫린 듯 가슴이 시원하다. 유럽 다른 나라 광장들보다 딱히 넓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많지 않고, 기념탑과 열주 회랑이 뒤를 받치고 있어서인지 넓게 느껴진다.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는 영웅광장은 1896년 착공해서 1929년 완공했다. 뒤편 중앙에 높게 뻗은 밀레니엄 기념비 끝에 천사 가브리엘이 왕관과 이중 십자가를 들고 있고, 탑 주변으로 헝가리를 건국한 일곱 부족 지도자들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 형상화된다. 기념비 양편으로 반원형의 거대한 열주 회랑이 이어지는데, 역대 왕과 영웅 14명을 동상으로 전시한다.


회랑 너머에는 버이더후녀드성(Vajdahunyad vára)이 있다. 895년 헝가리의 판노니아 평원 정복 1000년을 기념해서 1896년에 만들었는데, ‘드라큘라성’으로 알려진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의 후녀드성(Hunyad Castle)을 본떠 만든 것으로 유명했다. 앞서 부큐레슈티 여행기에서 소개한 드라큘라의 실제 모델 블라드 3세가 한 때 감금된 성의 고딕양식을 모방했다고 한다.


이어서 부다페스트 7지구인 유대지구(Jewish Quarter)로 향했다. 유럽에서 가장 큰(세계 2위) 도하니 시나고그(Dohány Street Synagogue) 건물 외관과 주변이 외지고 방치된 듯한 느낌이 남아있다. 지금은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폐허술집(Ruin Bars) 문화’로 유명하다는데, 찾아보니 2004년 최초의 루인 바 심플라케르트(Szimpla Kert)가 옮겨오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세체니 다리로 이동한 뒤 강변 근처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고 그 유명한 현수교의 야경을 담았다. 사진은 사라지고 필름은 어디 있을 게다. 언젠간 인화하겠지. 세체니 다리는 영화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에 잘 묘사돼 있다.




유스호스텔에 돌아와 씻고 누웠는데 아까 그 아르헨-스페인 커플이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왔다. 관광 대신 술 마시러 왔나 했는데, 이 용감한 커플이 “쉿” 하더니 같은 침대로 들어가 한동안 뒤척인다. 그 공개된 방에서, 그 많은 친구가 다 모른척한다. 유스호스텔은 이해와 사랑이다.


PS. 부다페스트의 핫스폿으로 떠오른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은 1998년엔 없었다.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본 기억이 없어서 확인하니 2차 세계대전 중 헝가리 화살십자당(Arrow Cross Party)에 희생당한 유태인을 추모하는 기념물이었다. 2005년 4월 16일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map009.jpg 부다페스트의 명소는 세체니다리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은 1998년엔 설치 전이었다.(구글지도)


[부다페스트 MTA] 부다 : 부다왕궁(Buda Castle), 어부의 요새(Fisherman's Bastion), 마차시 교회(Matthias Church), 겔레르트 언덕(Gellért Hill), 셀 칼만 광장(Széll Kálmán tér)

페스트 : 성 이슈트반 대성당(St. Stephen's Basilica), 세체니 다리(Chain Bridge), 헝가리 국회의사당(Hungarian Parliament Building),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 영웅 광장(Hősök tere), 버이더후녀드성(Vajdahunyad vára), 도하니 시나고그(Dohány Street Synagogue), 루인바(Ruin B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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