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떤 밤은, 말 한마디도 버겁다.
그럴 때 나는, 창가에 앉는다.
눈을 감고 커튼을 젖힌다.
한 줄기 바람이 실내로 들어오고, 함께 고요도 들어온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다, 잔잔한 물결, 멀리 반짝이는 선박 불빛.
마음이 스스로 고요해지는 경험은, 오랜만이다.
작은 창이 만들어주는 나만의 프레임.
세상의 한 조각을 떼어낸 듯한 풍경 속에 나는 조용히 내 하루를 눕혀본다.
파도는 소리를 죽이고 다가온다.
바람 한번 불 때마다 마음 속 먼지 하나씩 사라지는 기분.
도시의 소음과 일정의 압박이 지금 이 공간에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오후의 통영은, 마치 오래된 수채화 같다.
지나가는 배, 떠다니는 그림자, 그리고 하늘의 색이 바다에 묻어나는 장면.
그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내 안의 생각들도 수면 위에 떠오른다.
시간이 조금씩 느려진다.
느리게 움직이는 것들이 더 정직하게 느껴진다.
나는 더 이상 속도를 내지 않는다.
지금의 이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밤이 오면, 이 창은 또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수면 위로 퍼지는 조명들, 뿌옇게 번진 불빛, 그리고 그 불빛에 반사된 내 얼굴.
나는 나를 바라본다.
낯설지만 싫지 않은 모습.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온전히 혼자인 상태.
낡았지만 따뜻한 이 풍경엔 오래된 위로 같은 게 있다.
창문 너머 반짝이는 바다와 햇살에 부서지는 하루가 같이 웃고 있다.
햇살이 가득한 방.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의자.
누군가와 함께였던 시간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엔 여전히 빛이 머문다.
그날의 기억은 앨범처럼 이 방 안에 걸려 있다.
그 기억이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되려, 지금의 나를 더 단단하게 해준다.
그 모든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이 글은 제가 오래도록 기록해 온 이야기의 한 조각입니다.
그 흔적들을 모아 《통영,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는 책으로 묶어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준비하며 제가 받은 위로와 영감은 통영이 제게 건네준 선물이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리며, 혹시 통영의 풍경과 감정을 더 깊이 느끼고 싶으시다면 그 책 속에서 함께 걸어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