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과 윤이상

by 권한별

윤이상 기념관의 입구에 위치한 작은 터널을 지나면 도시의 소음은 점점 잦아들고, 대신 음악이 스며든다. 짧은 그늘을 따라 걷다 보면 햇빛은 등을 밀고, 바람은 조심스럽게 귓가를 스친다. 무심하게 자란 담쟁이 덩굴 아래에서 나는 문득 멈춰 서서 상상해본다. 혹시 그도 이 길을 걸었을까? 그가 바라보던 하늘은 지금과 같은 색이었을까?


기념관의 붉은 외벽은 오랜 시간에 깃든 상처처럼 다가온다. 녹슨 듯한 벽면은 세월을 견뎌낸 흔적이지만, 그 안에서는 여전히 자라고 있는 소리들이 있다. 마당마저 무대 같고, 햇살과 그림자까지 협주의 일부가 된다. 나뭇잎 하나, 그림자 하나가 모두 악보 위 음표처럼 자리 잡는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경사진 광장이 나타난다. 건축과 자연, 삶과 예술이 무심히 공존하는 공간. 무언가를 구분짓지 않으니 오히려 더 자유롭고, 구획되지 않았기에 더 넓게 느껴진다. 나는 유리문 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본다.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현악기의 떨림, 호흡을 가다듬는 정적, 악보를 넘기는 소리. 그 순간, 공기마저 숨을 멈춘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선율은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처럼 느껴진다.


“윤이상을 기억하며”라는 문구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춘다. 이름 석 자가 지닌 무게와, 그 이름이 통영에 남긴 온기가 고스란히 다가온다. 그는 단지 음악만 남긴 것이 아니다. 통영이라는 도시가 품은 감정과 시간을 소리로 남기고, 침묵으로 들려주었다. 그의 음악은 여전히 이 도시에 울리고 있다. 수많은 계절과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 그의 손끝과 호흡이 스며 있다.


기념관 마당에 앉아 있으면, 나무와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조차 오래된 협주곡의 일부가 된다. 단단한 나무들이 이곳을 오래 지켜왔듯, 그 자리는 혼자여도 외롭지 않은 공간이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 아래 가지들이 악보처럼 뻗어 있다. 불규칙하지만 정직한 선율, 들리지는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울림. 그의 악보도 이랬을 것이다. 복잡하지만 정직하고, 불완전하지만 오히려 그 자체로 완전한 음악.


그가 피아노를 치며 바라봤을 바다, 침묵 속에서 쌓아 올린 선율의 바다. 그 풍경은 지금도 변함없이 고요하다. 그러나 고요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말이 없는 것들이 더 깊은 울림을 전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그 바다 앞에 서 있으면, 음악과 도시, 예술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있음을 느낀다. 통영은 윤이상에게 단순한 고향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음악이 자라난 토양이었고, 그가 평생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내면의 바다였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도 통영은, 음악처럼 설명할 수 없는 울림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말

이 글은 제가 오래도록 기록해 온 이야기의 한 조각입니다.
그 흔적들을 모아 《통영,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는 책으로 묶어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준비하며 제가 받은 위로와 영감은 통영이 제게 건네준 선물이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리며,
혹시 통영의 풍경과 감정을 더 깊이 느끼고 싶으시다면 그 책 속에서 함께 걸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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