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동

by 권한별

햇살이 골목 끝까지 스며들던 오후였다. 작은 집 앞 마당에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기대도 없고 불만도 없는 듯, 그저 하루의 따스함에 등을 맡긴 채 묵묵히 버티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고요한 생명체를 보며 ‘사는 일’이란 결국 저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화려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온기, 말없이도 전해지는 평화. 봉평동의 첫인상은 그랬다.


골목의 벽마다 남아 있는 벽화는 시간이 빚어낸 편지 같았다. 색은 바래고 금이 갔지만, 오히려 그 균열 속에 더 단단한 의미가 스며 있었다. 붓질 하나하나에 이 동네 사람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듯했다.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나 역시 내 삶의 흔적을 저렇게 남길 수 있을까. 낡아도, 퇴색해도, 누군가의 눈길 앞에서 여전히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골목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오래된 목욕탕의 굴뚝이었다. 더 이상 연기는 피어나지 않지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기억을 환기시켰다. 피곤한 하루 끝에 찾아와 몸을 녹였을 사람들, 뜨거운 수증기 속에서 흘려보낸 웃음과 한숨, 잠시라도 고단함을 씻어내던 시간들. 스러진 불씨 같지만, 사실은 꺼지지 않고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는 온기.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런 흔적이 되고 싶고, 말없이도 존재의 이유를 품고 싶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면 노란 문이 반겨주는 작은 책방이 나온다. 가지런히 놓인 화분과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 문에 달린 작은 종소리까지, 이곳은 들어서는 순간 이미 ‘환영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설명이나 장식이 필요 없는 환대. 사람의 마음도 이런 식으로 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봉평동은 그런 따뜻한 마음을 골목마다 숨겨 놓은 듯했다.


책방의 지붕 위엔 파랑새가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가볍지만, 오래 머물러 주변을 바라보는 눈빛은 묘하게 든든했다. 그 존재만으로도 희망이 남아 있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나는 그 새를 보며, 내 안에 아직 꺼지지 않은 바람을 확인했다. 언젠가 사라진 줄 알았던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책방 벽에 새겨진 시구 하나가 내 발걸음을 붙든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모든 관계는 결국 서로에게 의미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나는 오래전 떠나간 사람들을 떠올렸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누군가도.



작가의 말

이 글은 제가 오래도록 기록해 온 이야기의 한 조각입니다.
그 흔적들을 모아 《통영,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는 책으로 묶어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준비하며 제가 받은 위로와 영감은 통영이 제게 건네준 선물이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리며,
혹시 통영의 풍경과 감정을 더 깊이 느끼고 싶으시다면 그 책 속에서 함께 걸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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