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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오누이 06화

그때 그 티브, 그리고 우리 집 마당

금성 티브 19인치

by 최순옥
프롤로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성실하셨다.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하시고, 또 아껴 쓰며 모은 돈으로 우리 집에 금성 티브를 들여놓으셨다. 그 티브는 단순한 전자제품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자랑이자 보람이었다.

내가 자란 동네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골목길엔 들꽃이 흔들렸고, 해가 질 때면 하늘은 붉게 물들었다. 이웃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며 정답게 지냈다.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그 시절의 기억은 지금도 내 마음 한편에 따뜻하게 남아 있다.

우리 집은 조금 특별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소 두 마리와 돼지도 키우셨다. 넓은 마당에는 고추, 오이, 파, 상추가 자랐고, 한편 우물에서는 펌프로 물을 길어 썼다. 돼지우리에서 ‘꿀꿀’ 울음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막 태어난 새끼 돼지를 방 아랫목에 조심스레 놓아두셨다. 뛰뚱뛰뚱 걷는 작은 돼지 새끼들, 배가 불룩한 모습은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사랑스럽게 남아 있다. 우리 가족과 돼지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였다.


본문

별보다 반짝이던 티브

1976년, 우리 가족에겐 작은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바로 금성 티브가 집에 들어온 것이다. 네 다리가 달린 커다란 그 티브는 동네에서 처음 보는 텔레비전이었다.

금성 티브 양문형 문도 달려있었다

빛나는 화면은 마치 별처럼 반짝였고, 어린 내 눈엔 세상 무엇보다 멋지게 보였다.

아마 19인치쯤 됐을까? 지금 생각하면 작지만, 그때는 얼마나 크고 신기했는지 모른다. 화면이 켜지던 순간, 온 가족은 숨죽여 그 빛을 바라봤다.

준섭 오빠와 순희 언니는 티브 앞에 바짝 붙어 밤늦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흑백 드라마 속 배우들의 이야기와 노래, 뉴스가 우리 집에 세상을 들여왔다.

아주 거대한 티브 화면이였다

주말이면 가족들이 둘러앉아 티브 앞을 지켰다. 가장 인기 있었던 건 ‘수사반장’이었다. 박 반장이 등장해 차분한 목소리로 사건을 추리해 나갈 때면,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참 지혜로운 사람이야”라고 하셨다.

가장 인기 많았던 수사반장

엄마는 ‘여로’를 보면서 장미희가 눈물 흘리는 장면에 따라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시곤 했다.

나는 ‘전원일기’를 가장 좋아했다. 김 회장네 이야기를 보면 꼭 우리 동네 이야기 같았고, 극 중 인물들의 억센 사투리와 푸근한 밥상은 우리 집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드라마가 끝나면 마당에 나가 앉아 오늘 본 장면을 이야기하며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엄마는 “공부 안 하고 또 티브만 본다”며 잔소리를 하셨지만, 그 잔소리마저 지금은 참 그립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 집은 동네 사랑방

티브가 들어오자 동네 사람들도 하나둘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때만 해도 티브가 있는 집이 드물어 우리 집은 자연스럽게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드라마 시작 전, 아이들과 어른들이 마루 앞에 모여 앉으면 나는 ‘여우 깍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왜냐면 들어오는 아이들 발에 흙이 묻었는지 꼭 검사했기 때문이다.

“발에 흙 묻었으면 안 돼! 발 닦고 와야 돼!”

나무 막대기를 들고 선생님처럼 말과 태도를 점검하던 내 모습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땐 자부심 가득한 ‘깔끔쟁이’였다.

병로 오빠, 그리고 콧물 한 줄기

옆집 병로 오빠는 나보다 세 살 많았다. 아저씨 뻘이었지만 순희 언니와 동갑이라 편하게 ‘오빠’라고 불렀다. 병로 오빠는 장난기가 많고 코도 자주 흘렸지만, 늘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나는 그의 발이 깨끗하지 않다며 가끔 막았고, “발 씻고 와!” 하며 살짝 꼬집기도 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났을 때 그가 말했다.

“순옥아, 네가 나 꼬집었던 거 기억나? 진짜 아팠어. 멍도 들었어.”

우리는 웃었다.

“오빠~ 그때 콧물도 흘렸잖아~”

그 시절, 그렇게 우리는 순수하고 장난스럽게 자랐다.


은행 다니던 아저씨

병로 오빠의 형, 우리에겐 ‘아저씨’라 부르던 분은 은행원이었다. 58년생으로 항상 셔츠 깃을 단정히 세우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었다. 내가 성인이 되어 직장 생활할 때는 신용카드 신청서도 챙겨 주시고, 사용법도 친절히 알려주셨다.

작년 봄, 할머니 장례식에서 오랜만에 뵈었을 때도 그의 웃음은 변함없었다.

“순옥아, 잘 지냈니? 네 아버지는 요즘 어떠시냐?”

그 진심 어린 인사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멀리 있어도, 세월이 흘러도 진심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계절을 닮은 마당, 그리고 오빠의 구슬

우리 집 마당은 사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줬다. 봄이면 돌치기와 고무줄놀이를 했고, 여름엔 맨발로 흙길을 밟으며 소꿉놀이를 즐겼다.

요즘도 흙길 걷는 걸 좋아한다. 의정부 아파트 단지 한쪽에 조성된 작은 흙길을 따라 걸으면, 문득 그 시절 마당의 흙냄새가 떠오른다. 가끔 비가 내린 후 촉촉하고 부드러운 흙 위를 퐁당퐁당 뛰어보기도 한다. 어릴 적 맨발로 뛰놀던 그 감촉이 그리워서일 것이다.

가끔 그 자리에서 PT 체조를 하기도 하고, 괜히 한바탕 달리며 웃기도 한다.

예전에는 해 질 무렵까지 마당에서 놀다가 흙 묻은 발로 방에 들어갔던 기억도 난다. 지금도 흙길을 걸으며 그때의 나를 만난다.

가을에는 구슬치기, 겨울에는 손이 시리도록 놀다가 집에 들어와 엄마가 내어주신 동치미 국물로 언 손을 녹였다.

오빠는 구슬치기에서 예쁜 구슬을 골라 내 손에 쥐여 주곤 했다. 그 마음이 참 예뻤다.

겨울이면 손등이 하얗게 트고, 엄마가 크림을 발라주셨다. 따가워서 울기도 했지만, 다음 날 또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자랐다.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책 좀 봐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렸지만, 그 잔소리마저 지금은 그립다.


에필로그

오늘도 나는 그때 그 기억을 떠올린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던 따뜻한 시간들. 금성 티브 앞에서 함께 웃고 이야기하던 날들, 마당에서 흙을 밟으며 뛰놀던 어린 시절은 내 안에 별처럼 반짝인다.

세상은 변해도, 동네는 변해도 내 마음속 그 집, 그 마당, 그리고 그 티브는 여전히 그 자리다. 나는 그 추억들을 가슴 깊이 품고 살아간다.


마무리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이 변했지만, 추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성껏 키우던 돼지들처럼, 가족과 이웃이 만들어 준 소중한 기억들은 결국 행복의 증거였다.

오늘도 나는 미소 지으며 그때 그 티브를 떠올린다.

참 단단하고 따뜻했던, 그 시절의 기억들.

하하하,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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