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보물상자와 햇살 같은 기억
프롤로그
돌이켜보면, 오누이라는 존재는 단순한 혈연을 넘어 삶의 힘이 되어주는 특별한 관계였다.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오빠와 나 사이의 정은 어릴 적 그 소박하고도 소중했던 기억들 안에 여전히 살아 있다.
오빠가 건넸던 공손한 인사 한마디, 고향집 툇마루와 넓은 마당에서 나는 흙냄새를 맡으며 뛰놀았다.
귀걸이로 장난치던 그 해맑은 순간들,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던 붉은 불꽃의 따스한 온기, 여름날 임진강에서 개복숭아로 장난치며 웃음꽃을 피웠던 날들.
그리고 부드러운 햇살이 가득 쏟아지던 오후, 철부지 막내 이모와 함께 뛰놀던 그 행복한 시간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도 내 마음 한편에서 따뜻한 빛을 내며 나를 지켜주고 있다.
오빠, 그리고 나.
서로에게 기대며, 아무것도 없어도 웃을 수 있던 우리 둘만의 시간이 있었다.
본문
어릴 적 우리 집 옆에는 키가 작은 옆집 아저씨와 키가 큰 멋쟁이 옆집 아주머니가 살았다.
옆집 아주머니는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을 다녀오셨고, 언제나 단정하고 반짝이는 옷차림에 작은 가방을 들고 나타나셨다.
늘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옷차림에서 세련된 감각이 느껴졌고, 손에는 손때 묻지 않은 작은 가방이 들려 있었다.
서울에도 집이 있어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 오셨고, 15살 많은 언니, 12살 많은 언니와 4살 많은 오빠는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나에게 그 아주머니는 서울의 향기 같은 존재였다.
언제나 “순옥아, 요 깍쟁이 예쁜 것” “너, 내 딸 하자”하며 다정하게 부르셨고, 나는 그런 말투와 따뜻한 목소리가 참 좋았다.
아주머니가 서울에 가는 날이면 나는 특별한 기다림에 설렜다. 왜냐하면 아주머니가 늘 서울에서 귀한 바나나를 사 오셨기 때문이다.
시골 마을에선 바나나가 흔하지 않아, 그건 마치 부잣집 음식처럼 여겨졌는데 아주머니는 바나나를 잊지 않고 매번 선물로 주셨다.
우리 마을엔 하루에 버스가 여섯 번밖에 다니지 않았고, 나는 아주머니가 돌아오실 시간에 맞춰 툇마루에 앉아 조심스레 마당 문 밖을 내다보며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12시 버스는 언제나 그냥 지나갔고, 3시 버스가 도착하면 아주머니가 내렸다.
나는 달려가서 꼭 안고 싶었지만 부끄러움에 멀리서 바라만 봤다.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들어서자 손에는 노란 바나나 두 개가 들려 있었다.
그 바나나를 아주머니가 까서 내 입에 물려주실 때, 내 가슴은 두근거림으로 가득 찼다.
한 입 베어 문 바나나의 달콤함에 나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계속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바나나 한 조각이 툇마루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아쉬움에 눈물이 핑 돌았고,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아주머니는 웃으며 “괜찮다” 하셨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 바나나가 너무나 소중했다.
아주머니는 다시 바나나 두 개를 꺼내 주셨고, 나는 그중 하나를 몰래 책상 밑에 숨겨 두었다.
특히 가장 잘 익은 바나나 하나는 내 마음속 보물상자에 넣은 것처럼 조심스레 간직했다.
그 바나나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나만의 작은 행복이자 비밀이었다.
오빠와 언니가 집에 오자 나는 숨겨둔 바나나를 꺼내 하나씩 나누자고 했다.
“한 입씩만 먹자”는 내 말에 언니는 반을 더 크게 베어 물었고, 나는 장난스럽게 언니를 살짝 밀쳤다.
오빠는 조용히 한 입 먹고는 “정말 달고 맛있다”며 웃었다.
그 웃음이 참 따뜻하고 포근했다.
저녁이 되어 부모님이 일터에서 돌아오셨고, 엄마는 “순옥이 덕분에 귀한 바나나 맛을 보네” 하시며 환하게 웃으셨다.
나는 얼른 “엄마, 더 드세요. 나 또 있어요” 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엄마는 살짝 미소 지으며 겨우 바나나 끝부분만 입에 댔다.
그날 밤 나는 바나나 하나를 더 꺼내 오빠에게 건네며 “오빠, 더 먹어”라고 했다.
그 바나나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나의 마음과 정성이 담긴 진짜 보물이 되었다.
대령 아저씨와 부인 대령이모는 늘 우리를 다정하게 챙겨주셨다.
아버지는 부대에서 가져온 건빵을 매우 귀한 간식으로 여기셨다.
이모는 곤로를 능숙하게 켜고 냄비에 기름을 붓고 건빵을 노릇노릇하게 튀겨 주셨다.
바삭해진 건빵 위에 설탕을 살살 뿌려주셨는데, 우리는 그 설탕 한 알 한 알을 아끼며 혀로 조심스럽게 핥아먹었다.
바구니 바닥에 떨어진 설탕까지 손가락으로 문질러 먹으며 기름종이가 구멍 날 때까지 즐겼다.
그 단순한 간식에 담긴 이모의 정성과 사랑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느 날, 오빠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물을 끓였다.
쇠로 된 세숫대야를 문지방 위에 올려두고 한 바가지를 떠서 나에게 주던 순간, 나는 실수로 뜨거운 물을 발등 위로 쏟아버렸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자 엄마가 달려오셨고, 펌프질을 하여 찬물에 발을 담그게 하셨다.
얼마 후, 대령 아저씨의 무대에서 찝차가 달려왔고, 흰 가운에 흰 완장을 찬 군인 의사가 안방으로 들어와 내 발을 소독했다.
링거병을 본 나는 무서움에 소리를 질렀고, 아버지와 군인들이 내 팔다리를 붙잡으며 소독을 했다.
그날 밤의 기억은 아픔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사랑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며칠 뒤부터 언니는 나를 업고 1.5킬로미터 떨어진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빠도 수업이 끝나면 달려와 나를 업고 함께 돌아오곤 했다.
그들의 따뜻하고 든든한 등에 기대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듯했다.
목발을 짚기 시작한 후에는 언니가 가방을 들어주고, 오빠가 하굣길을 함께 해주었다.
넓고 따뜻한 그 등 위에서 나는 아픔을 잊었고, 마음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쉰다섯이 된 지금, 내 발등에는 여전히 그날의 흔적이 희끗희끗 남아 있다.
상처의 얼룩은 아프던 순간보다, 나를 감싸 준 사랑을 기억하게 한다.
옆집 아주머니는 서울에서 사 온 예쁜 색깔의 사탕을 한 통씩 주셨고, “너만 먹어라” 하시며 쿠키도 챙겨주셨다.
나는 그 마음을 오빠와 언니와 나누었고, 아주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평생 기억할 것이다.
아주머니는 내게 “딸 삼고 싶다”라고 하셨고, 나는 그 말이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에필로그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 작고 소중한 순간들이 내 삶을 든든하게 지켜준 힘이었다.
아주머니의 따뜻한 눈빛과 바나나 한 송이, 대령이모가 정성껏 준비한 간식, 그리고 오빠와 언니의 든든하고 따스한 손길이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았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가족의 사랑과 정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오누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고, 그 기억들은 내 삶을 더욱 따뜻하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오늘도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마음 한 켠에 미소 짓는다.
오빠, 그리고 나.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오늘도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