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의 숨결이 머물던 자리

이별할 수 없는 이별

by 최순옥
프롤로그 — 아득한 2009년의 봄

2009년 5월, 엄마와 아버지는 건강검진을 위해 함께 삼성병원에 입원하셨다.

의사께서는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폐렴 기운이 조금 있습니다. 방치하지 말고 8월 안에는 꼭 재검받으세요.”


하지만 엄마께서는 늘 그랬듯, 자신보다 일부터 챙기셨다.

그해 도토리는 유난히 풍성했고, 벼농사와 고추농사까지 겹쳐 엄마께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밭에 나가셨다.

는 매일 곁에 있었지만, 그저 ‘감기겠지’ 하고 넘겼다.

감기약을 드시고 조금 나아지면 괜찮을 거라 믿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단순한 감기가 아니었음을.


엄마를 방치한 나의 죄

가을이 깊어질수록 엄마의 숨소리는 점점 가빠졌다.

11월 중순, 퇴근 후 집에 돌아가면 엄마께서는 숨을 몰아쉬며 말씀하셨다.

“이상해, 숨이 차서 누워도 답답해.”

그제야 나는 직감했다.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는 것을.

11월 20일, 근무 중이던 저는 조퇴를 내고 엄마를 대학병원에 모셨다.


아는 분의 도움으로 검사를 받을 수 있었고, 결과는 며칠 뒤 알게 되었다.

그러나 12월 초, 전화벨이 울리던 날은 잊을 수 없다.

“어머니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빨리 내원하세요.”

그 한마디에 저는 주저앉았다.

폐암 말기였다.

귀로 듣는 순간 세상이 멈췄고, 눈앞이 아득해 숨이 막혔다.

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고, 눈을 떴을 때 보건 선생님과 동료들이 제 곁을 감싸고 있었다.

주무관님 괜찮아요?”

저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눈물만 흘렸다.


그때 세상 모든 빛이 꺼지는 듯한 절망을 처음 느꼈다.

이후 저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다.

왜 그토록 엄마의 이상 신호를 놓쳤을까.

왜 그렇게 무심했을까.

감기라 여기고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던 시간이 모두 나의 죄가 되었다.

는 엄마를 방치했다.

그 죄책감은 지금도 저를 따라다닌다.


버텼던 날들

2010년 1월, 뜻밖의 발령으로 새로운 직장에 적응해야 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도 마음은 무거웠다.

엄마 병환이 깊어지던 시기였다.

는 두려웠다.

엄마를 두고 낯선 환경에서 새 출발을 해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 잔인했다.

밤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빠르게 변하는 제 일상과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제가 지금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걸까’,

‘엄마는 오늘도 숨이 차서 힘들겠지’라는 생각이 불안과 자책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텼다.

3개월 만에 체중이 5킬로그램 빠졌다.


밥을 삼키는 게 미안했고, 웃는 게 죄스러웠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견뎠는지 모를 만큼, 본능적으로 살아야 했기에 버텼다.

지금 돌아보면 참 독했다.

마음이 부서져도 울지 않고 버텼다.

사람들은 막내인 나를 다독였다.


언니는 단단했다. 울지도 않고 버텼다. 나는 울고불고, 그저 바람에 휘날리는 휴지 한 장과 같았다.

나약함 속에서 떠다니던 내 모습이, 언니에게는 참 부러웠다. 언니의 단단함, 흔들리지 않는 마음, 고요한 강인함…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닿을 수 없는 높이의 빛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때 몰랐다. 언니가 강한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담담히 견뎌온 시간이 만들어낸 것임을.

나는 아직도 그날들을 떠올리면, 나 스스로에게 초라함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언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배운 것이 있다. 강함은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울고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그 순간의 나는 바람에 흔들리던 작은 조각이었지만, 언니의 단단함과 따뜻함 속에서 나도 조금씩 자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눈물과 후회 속에서, 나는 천천히 나만의 단단함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강함은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지켜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언니는 나를 다독였지만, 나 역시 언니의 강인함을 바라보며 나만의 힘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거짓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던 휴지 한 장이, 서서히 땅을 붙잡듯, 나 또한 흔들리면서도 단단해지는 법을 배워가려고만 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마지막 시간

아버지는 우리를 불렀다.

엄마가 1인실로 옮겨지던 날, 나는 듣기만 했고 엄마를 쉽게 마주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엄마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음을 직감하고 계셨고, 병원에서도 조언을 받으셨다.

엄마가 1인실에 들어가자 우리는 모여 의논했다.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씀하셨다.

“순옥아, 엄마는 이제 희망의 불이 꺼졌으니 우리 엄마를 편히 보내드리자.”

아버지는 엄마를 고향집, 우리 집으로 모시자고 하셨다.

가족들은 아버지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2010년 8월 27일 오후 1시, 엄마를 집으로 모셨다.

엄마 머리는 빡빡 깎였고,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까칠하게 자라 있었다.

조심스레 엄마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는 몸이 부어 움직임도 쉽지 않았다.

집에 온 엄마에게 저는 간절히 물었다.

“엄마, 저한테 할 말 없으세요? 해주세요.”

앙탈 같은 부탁이었다.

엄마는 조용히 “없다”라고 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우리 8살 아들에게만 진심 어린 유언을 남기셨다.

“아가야,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가 하고 싶은 과학자 꿈을 꼭 이루렴. 할머니랑 약속해.”

딸인 나에게는 그저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예쁜 것, 예쁜 것”이라고만 하셨다.

그 미소 속에 전하지 못한 말들이 담겨 있던 것 같다.


엄마는 고통스러운 항암과 통증 속에서도 8개월을 버티셨다.

퉁퉁 부은 얼굴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는 미치도록 울고 싶었지만 엄마 앞에서는 참았다.

엄마는 ‘아리랑 고개’를 부르셨다.

그때의 미소가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엄마는 끝까지 노래를 다 부르셨다.

난 엄마의 노래에 따라 박수를 쳤다.

아버지도 엄마의 노래에 같이 부르시다 멈칫하다 박수를 치셨다.


엄마는 동네에서 인자하고 따뜻한 분으로,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으셨다.

아침이면 동네 분들이 교대로 인사를 오셨고, 나의 손을 잡고 함께 눈물을 흘리곤 하셨다.


2010년 8월 30일 아침, 나는 엄마에게 약속했다.

“엄마, 잘 다녀올게요.”

엄마는 눈을 완전히 뜨지 못하셨지만 작게 끄덕여 주셨다.

난 엄마 볼에 뽀뽀를 하고 손을 잡아 쓰다듬었다.

엄마는 간간히 내 손을 잡으시며 힘을 주신듯 하다.


사무실에 도착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그 번호를 보는 순간 저는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음성은 낯설고 무거웠다.

“순옥아, 엄마가 떠나셨어.”

는 주저앉았고, 운전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떨렸다.

집으로 향하는 길, 엄마를 의료원으로 이송해야 한다며 119가 와 있다고 했다.

는 “안 돼요, 금방 갈게요”라며 집으로 달려갔다.

집 마당에는 이미 119 구급차가 와 있었고, 동네 분들이 울고 계셨다.


현관 계단을 오르는 힘조차 없었고, 거실로 들어서자 안방에 흰 이불 덮인 엄마가 누워 계셨다.

“엄마, 죄송합니다. 가는 길 엄마를 같이하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떠나지 마세요.”

는 엄마를 꼭 붙잡았다.

큰아버지가 다가와 저를 진정시키셨고, 엄마는 119를 타고 의료원으로 이송되셨다.


그날, 엄마가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했다는

기억은 평생 나의 마음에 남아 있다.


에필로그 — 용서의 그림자

시간이 흘러도 그해 겨울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

병원 복도의 소독약 냄새, 엄마 손끝에 남은 미약한 체온, 창문 너머 희미하게 들리던 기침 소리.

나는 아직도 그날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낀다.


엄마는 내가 자책하며 살길 바라지 않으셨다.

그분은 늘 나를 다독이셨다.

“괜찮다, 그때도 넌 최선을 다했지.”

그 말이 들려오는 듯한 밤이면, 저는 아주 조금 스스로를 용서한다.


지금 내 마음으로

이 글을 쓰면서 울컥거림을 억지로 참았다. 이를 깨물고, 입술을 깨물었다.

밤 산책을 하며 쏟아지는 눈물을 온몸으로 흘리며 달렸다.

엄마를 생각하면, 그리움과 죄책감, 사랑과 후회가 뒤섞여 마음이 터질 듯했지만,

그럼에도 글을 쓰며 조금씩 숨을 고르고, 마음을 붙잡았다.


눈물 속에서도 엄마의 미소와 따뜻함이 떠올라,

나를 다독이는 힘이 되어 주었다.


엄마 보고 싶어, 고마워, 사랑해.✉️

“어릴 적 나를 안고 계신 엄마, 따뜻했던 순간”


다음 편 예고

아버지의 의자 9편 — 아버지의 두 번째 봄

2010년 여름, 엄마를 잃고도 끝내 웃지 못하던 아버지.

그의 외로움 속에서 다시 피어난 한 이름, 그리고 딸로서 느낀 미움과 이해가 엇갈리던 시간.

그 계절, 나는 아버지와 새로운 감정의 경계에 서 있었다.

아버지의 삶이 다시 봄을 맞으려 하던 그 순간을 이야기할 예정이다.


서로의 마음을 잇는 자리

누군가를 떠나보낸 뒤 남겨진 마음의 무게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복잡하다.


아직 전하지 못한 이야기, 다 건네지 못한 감정, 그리고 오래도록 마음속에 머무는 그리움이 있다면-

이곳은 그런 마음들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조용한 쉼터가 되고 싶다.


서로의 경험과 진심 어린 위로가 모여 각자의 아픔이 조금씩 나누어지고,

그 틈 사이로 작지만 따뜻한 빛이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의 짧은 발자국 하나,

그 조용한 흔적이 누군가의 마음에 따뜻한 위로로 닿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천천히 그리고 함께 걸어가고 싶습니다.

keyword
화,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