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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의 사랑, 그리고 이해의 자리

부모님의 은혜

by 최순옥
프롤로그
어머니의 빈자리, 그리고 시간의 무게

어머니께서 떠나신 뒤, 집 안은 한동안 고요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숨조차 쉬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식탁에 앉아도 대화는 사라졌고, 오직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퍼졌다.


모든 소리가 작아졌고, 감정은 더없이 조심스러워졌다.

아버지는 낮이면 밭으로 나가 땀을 흘리셨고,

밤이면 어머니 영정 앞에 조용히 앉아 향을 피우셨다.

그 향이 타들어가는 동안, 방 안에는 말 없는 슬픔이 가득했다.

눈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내가 흘린 눈물보다 더 깊고 날카로웠다.


그 무언의 시간 속에서 나는 매일 어머니를 다시 떠나보냈다.

한 사람의 빈자리가 이토록 길고 깊게 삶을 적시는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침묵이라는 외로움

시간이 조금 흐르고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손에 잡히는 순간마다 기억이 따라붙고, 그 기억마다 따뜻한 체온이 묻어 있었다.


어머니께서 예순다섯 되시던 해, 닥스 베이지색 바바리를 사시며

“이거다.” 하고 미소 지으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체크 안감에 털이 덧댄 그 코트는 겨울 내내 어머니 어깨를 감싸주던 품 같은 옷이었다.

그 바바리는 나에게도 마음의 선물이었다.

아침에 입을 수 있도록 살짝 다림질해서 주시던 그 마음까지 고스란히 남았다.


가죽 손잡이가 닳은 브라운 핸드백, 손때 묻은 바느질통, 반쯤 남은 스킨크림, 세탁망 속에서 빠져나온 작은 수세미 하나까지—

모든 것이 여전히 어머니의 향기를 품고 있었다.

그 물건들을 자개장 속에 차곡차곡 정리하며, 나는 마음속

으로 수없이 ‘엄마’를 불렀다.

그 이름 하나 부르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 어머니-일상의 노고

어머니는 아들 다섯 살과 딸 두 살을 돌보시느라 하루가 늘 바쁘셨다.

작은 손으로 아이들 간식을 챙기고, 젖은 빨래를 널며, 밭에서 농사일까지 살피셨다.


그 손은 손등이 두꺼워지고, 굳은살이 박여 거칠어졌지만,

그 속에는 늘 아이들을 향한 세심한 배려와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단단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들은 호기심이 많아 늘 사고를 치고, 딸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손길을 필요로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작은 몸을 낮추어 아이들을 바라보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시면서도 포근한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농사일도 아버지 혼자 하기 버거우셨기에, 논과 밭을 돌보며 손수 일하신 어머니의 뒷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저릿하도록 큰 노고였음을 느끼게 한다.

날마다 바쁜 하루를 보내면서도, 어머니는 그 손으로 가족을 품고 지탱하셨다.

"추억의 목욕탕" 사랑하는 할머니와 요구르트


낯선 변화

어느 날, 아버지 방 창가에 연둣빛 커튼이 달려 있었다.

책상 위엔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생기가,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아버지, 누가 다녀가셨어요?”

조심스레 묻자, 아버지는 고개를 돌리지 않으시고 말씀하셨다.

“재호 오빠네 어머니가 있지.

가끔 소주 한잔 나누는 사이고.

네 엄마와도 정이 많았던 분이잖아.”

아버지의 말투에는 어딘가 낯선 따뜻함이 스며 있었다.

그 따뜻함이 처음엔 조금 서운했지만, 곧 그 또한 외로움의 다른 이름임을 알았다.


요즘 아버지는 식사를 거르시는 날이 많았고, 몸이 야위어 가셨다.

그 아주머니는 녹두전이나 김치전을 부쳐다 주셨고, 큰어머니도 두부 전을 해 오셨다.

형제들이 돌아가며 아버지를 챙겼다.

아버지는 말로 표현하지 않으셨지만, 굽은 어깨와 고단한 뒷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분의 논두렁은 점점 더 단정해졌다.

아버지는 일 속에서 스스로를 잊고자 하셨다.


오래된 편지

며칠 뒤, 아버지 방 서랍을 정리하다 노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빛바랜 종이를 펼치자,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순옥에게.

네 어머니는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평생 사랑했단다.

말은 서툴렀지만, 마음은 늘 그 곁에 있었지.

그 사람 없었으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초라했을 거야.”


편지는 손때에 닳고, 잉크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번져 있었다.

그 한 장 안에 아버지의 인생이, 사랑이, 후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한참을 울었다.


창밖엔 바람이 지나가고, 오래된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그 소리에 맞춰 지난날들이 하나씩 흩어졌다.

이해하지 못해 미워했던 시간들,

표현하지 못한 사랑을 외면했던 기억들.

눈물을 닦으며,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마음속 울분을 조금씩 녹여주었다.


첫 소통

나는 편지지 뒷면에 몇 줄을 적었다.


“아버지,

엄마는 이 편지 읽고 미소 지으실 거예요.

‘참 당신답다’ 하시면서요.

저도 이제 아버지께 조금 더 따뜻해지려 해요.

어색해도 괜찮죠?

앞으로는 그냥, 우리 함께 있어요.”


그 편지를 다시 서랍 안에 넣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우리의 첫 번째 진심이었다.

며칠 뒤, 겨울이 지나고 햇살이 스며들던 아침.

아버지는 밭으로 나가셨다.

손에는 작은 모종 하나가 들려 있었다.

거칠지만 부드러운 손길로 흙을 일구며, 그분의 두 번째 봄이 천천히 피어나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아 나도 흙을 만졌다.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우리 딸, 막내"

"소중한 딸 우리 순옥이…”

어린 순옥이

그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저릿했다.

그동안 듣고 싶었던 말, 아버지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말이었다.

그 한 줄에 담긴 수많은 감정이 밀려와

가슴속 매듭이 스르르 풀렸다.


에필로그 ― 용서의 자리

이제 나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슬픔으로만 채우지 않는다.

그 자리에 이해와 용서를 놓는다.

사랑은 떠나도 흔적은 남는다.

그 흔적은 아프고 서럽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자라고 또 살아간다.


아버지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오해와 침묵의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조금씩 다리를 놓았다.

그 다리의 어딘가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것이다.


봄은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봄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오는 계절이라는 걸.

그 봄은, 떠난 사람의 사랑이 남은 자의 마음에 다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다음 편 예고

아버지의 의자 10편 ― 소풍 같은 하루

어머니의 첫 제삿날 이야기.

슬픔보다 따뜻함이 더 짙게 남았던 하루,

소풍 같았던 그날의 풍경 속에서 가족의 웃음과 조용한 나눔이 교차했다.


아이들은 제법 자란 모습을 보여주었고,

작은 일상 속에도 어머니의 사랑이 여전히 스며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의 이야기 속에서 또 하나의 봄이, 천천히 피어난다.

엄마의 따스한 무릎
작가의 말

누군가를 떠나보내면 삶에는 금이 간다.

그 금을 메운 건 서툰 사랑과 천천히 쌓인 이해였다.

아버지의 오래된 편지를 통해 배운 감정들이

비슷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느리고 서툴지라도,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닿아가는 그 시간이 누군가에게 또 하나의 두 번째 봄이 되기를.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사랑의 모양으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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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