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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같은 하루

어머니의 제사

by 최순옥
프롤로그 — 엄마 없이 맞는 첫 제삿날

엄마가 떠난 지 어느덧 사계절이 흘렀다.

계절이 몇 번 바뀌는 사이, 나는 ‘엄마가 없는 삶’에 조금씩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첫 제삿날을 앞두고는 가슴 한편이 자꾸 서걱거렸다.


매년 이맘때면 엄마는 제사 음식을 하나하나 정성껏 준비하느라 분주했고, 나는 그 옆에서 심부름을 하거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시간이 지겹게만 느껴졌던 지난날이 이제는 손끝이 허전할 만큼 그리워졌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밭일을 핑계 삼아 밖에 나가 계셨고,

나는 엄마의 빈 부엌에 홀로 서서 조심스레 메모지를 꺼냈다.

엄마가 늘 했던 그대로, 도라지 무침, 나물 두어 가지, 생선, 잡채, 식혜를 하나하나 적었다.

엄마가 좋아했고, 꼭 빠뜨리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제삿날이란 무겁고 엄숙한 날이라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다르게 시작되고 있었다.


슬픔과 그리움이 있었지만, 그것은 조용하고 따뜻한 온기로 내 몸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마치 겨울이 지나, 아직 덜 녹은 땅 위로 햇살이 스며드는 것처럼.


엄마의 부엌, 다시 불이 켜지다

아침이 밝자, 큰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르고 집으로 들어섰다.

“자, 내가 국물 맡을게.”

큰어머니는 엄마와 가장 닮은 손맛을 가진 분이었다.

도라지를 껍질째 들고 오시며 말했다.

“이거, 고모가 작년에 정성껏 말려두신 거야. 엄마 생각하면서 꼭 쓰라 하셨지.”

도마 위 도라지를 만지던 손끝에서 말없는 그리움이 조용히 흘렀다.

큰어머니가 웃으며 덧붙였다.

“엄마는 도라지 하나 무칠 때도 꼭 세 번 씻고, 다섯 번 무쳤지. 그런 정성이 어디 있겠어.”

부엌 한편에서는 형제들이 조용히 상을 닦고, 전을 부치며 움직이고 있었다.

말은 적었지만, 각자의 손끝에 마음을 실었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부엌에 다시 생명이 깃드는 듯했다.

또 다른 가족, 큰삼촌과 큰 외숙모도 함께 계셨다.

엄마는 장녀로서 어린 큰삼촌을 업어 키우며, 늘 크고 든든한 손이 되어 주셨다.

그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부엌 한편에서 조용히 상을 닦는 큰 외숙모의 손길,

그리고 그 곁에서 말없이 움직이는 큰삼촌의 모습이 마치

엄마가 오래도록 지켜온 가족의 온기를 그대로 이어가는 듯했다.


나는 상을 닦고, 아버지는 제기들을 꺼냈다.

말은 없었지만, 모든 움직임에는 조심스러운 정성이 담겨 있었다.

아무도 엄마를 입에 담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알았다.

오늘 이 상을 차리는 이유와 마음의 무게를.


음식이 하나둘 상 위에 놓이고, 향로 옆에는

엄마의 작은 사진이 놓였다.

아버지가 조심스레 향을 피우며 자리를 잡았다.

그 순간, 아주 먼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봄날 엄마와 함께 갔던 강가 소풍.

돗자리 위 삶은 달걀과 김밥, 엄마의 환한 웃음소리, 그리고 아버지의 투박한 손길까지.

그 기억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색이 바래지 않았다.

문득 이 제사상 앞에서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

엄마는 지금 우리 곁에 없지만, 그날처럼 조용히 우리 사이에 앉아 계신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


밥상, 그리고 다정한 사람들

제사를 마친 뒤, 우리는 둘러앉아 상을 가운데 두고 음식을 나눴다.

평범한 나물과 생선, 식혜였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말했다.

“이상하게도 오늘 음식이 더 맛있다.”

큰어머니가 식혜를 한 숟갈 떠먹으며 말했다.

“너네 엄마는 식혜도 꼭 배즙을 조금 넣어서 달콤하게 만드셨지. 이 맛이 바로 엄마 맛이야.”

아버지는 말없이 밥을 드셨다.

숟가락을 드는 손이 평소보다 느려졌고, 밥그릇을 내려놓은 순간 잠시 멈춰 섰다.


그 조용한 틈에서 나는 그의 마음이 무너졌다 다시 일어서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엄마도 지금 웃고 계시겠죠?”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큰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는 이런 분위기 좋아하셨어. 울지 말고, 같이 밥 먹고, 웃고…”


형제들과 나는 눈을 마주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엄마가 정말 바랐던 제사는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무겁지 않은 기억, 함께 나누는 밥상, 가벼운 그리움, 그리고 여전히 이어지는 우리들.

보고싶은 우리 엄마
아버지의 의자, 변해가는 풍경

저녁 무렵, 아버지는 익숙한 의자에 앉아 향을 피우셨다.

예전과 다름없어 보였지만, 옆에 내가 함께 앉아 있는 점이 달랐다.

우리는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한참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제사도… 나쁘지 않구나.”

그 말이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무겁게만 느껴졌던 제삿날이 어느새 그리운 사람과 함께한 소풍처럼 다가왔다.

엄마는 그날, 정말 우리 곁에 다녀가신 것만 같았다.


아버지 마당에서 대추와 밤 준비

가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마당 한편, 아버지는 조심스레 대추를 수확하고 계셨다.

잘 익은 붉은 대추들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알알이 영글어 윤기가 돌았다.

가끔은 예쁜 대추를 골라내며 미소를 지으셨다.

옆에서는 울타리 밤을 다듬고 깎으셨다.

투박한 손길이지만 정성스러웠다.

밤송이의 가시를 조심스레 떼어내고, 깨끗하게 다듬은 밤은 마치 소중한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모습은 어느새 우리 가족의 마음에도 깊은 온기와 정성을 전해주었다.


에필로그 — 그리움 속의 온기

엄마가 떠난 첫 제삿날은 뜻밖에도 고요했고 따뜻했다.

그리움은 무겁지 않았고, 밥상은 추모보다는 ‘기억’이었으며, 향은 이별이 아닌 ‘안부’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슬픔이 아닌 ‘함께했던 시간’을 나누며 하루를 건넜다.

형제들과 나, 가족 모두가 함께 웃고, 함께 기억했다.

엄마는 분명 우리 곁에 계셨다.

상을 맨 끝에 조용히 앉아 우리가 웃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이렇게 속삭였을 것이다.

“그래, 그래야지. 잘 살아야지.”

곱고 고우셨던 그 이름 나의 엄마


다음 편 예고 — 아버지의 봄날

엄마를 보낸 뒤, 아버지에게도 조용한 변화의 기척이 찾아왔다.

무뚝뚝하고 말이 적던 아버지의 일상에 어느새 스며든 작은 온기,

그리고 다시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서 맞이한 또 다른 봄의 시작.

다음 편에서는 그 따스한 봄날, 아버지와 함께하는 새로운 시간이 펼쳐진다.


작가의 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자리엔 늘 커다란 빈틈이 남는다.

그 빈틈을 메우는 것은 거창한 말이나 위로가 아니다.

결국 사람이었다. 함께 밥을 먹고, 조용히 웃고, 같이 그리워하는 시간.

제삿날이 꼭 슬픔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란 걸, 그날 우리는 처음 알았다.

이 글이 같은 시간을 건너고 있는 누군가에게 소박한 위로가 되길 바란다.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라도, 봄은 다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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