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찾아낸 알약들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을 때, 당신은 당황하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당신의 눈동자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그 속엔 들켜버린 자의 수치심보다 더 깊은 어떤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여보, 나 좀 믿어주면 안 돼? 약을 먹으면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하루 종일 멍하니 누워만 있는데, 내가 어떻게 우리 애를 돌봐. 나 정말 괜찮아. 내가 잘 조절할 수 있어. 정말 안 좋을 때만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게, 응?"
당신의 목소리는 너무나 간절했고, 그 눈동자에는 자신을 잃고 싶지 않다는 처절한 엄마로서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약 기운에 취해 좀비처럼 거실을 배회하는 것보다, 차라리 조금 예민하더라도 '진짜 엄마'로 살고 싶다는 당신의 항변 앞에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이 약해졌다.
"알았어. 그럼 정말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말해야 해. 약속해."
나는 결국 해서는 안 될 위험한 타협을 하고 말았다. 아픈 아내를 향한 안쓰러움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나의 조급함이 빚어낸 비극적인 악수였다.
그날 이후, 우리 집에는 묘한 적막이 감돌기 시작했다. 당신은 약속대로 아이에게 더 다정해지려 노력했다. 하지만 약이 끊긴 뇌는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금씩 비틀거리고 있었다. 당신이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 같지 않았다. 사랑 가득한 엄마의 눈빛이라기엔 너무나 길고,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한 서늘한 관찰자의 눈빛이었다.
아직 말도 서툰 어린 딸은 그 본능적인 공포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했다. 엄마가 웃으며 다가와 손을 잡으려 하면 아이는 슬그머니 내 뒤로 숨거나, 놀던 장난감을 멈추고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아이의 눈에 비친 엄마는 이제 더 이상 편안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겉모습은 엄마였지만, 그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낯선 기운을 아이는 작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느 오후였다. 거실 한복판에서 당신과 아이가 마주 앉아 있을 때, 나는 부엌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은 아무 말 없이 아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아이는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떨구고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당신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다정한 옹알이가 아니라, 아이를 향한 낯선 의심의 파편들이었다.
"너... 아빠한테 다 말했지? 아빠가 너 시켜서 엄마 감시하는 거지?"
낮게 깔린 당신의 목소리에 거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나는 아내를 믿고 싶다는 마음과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 사이에서 매일 밤 피가 말라갔다. 당신의 '조절할 수 있다'는 오만이 우리 가족의 가장 약한 고리인 아이를 서서히 옥죄고 있었다. 이제 거실은 더 이상 웃음이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었지만, 각자 다른 공포의 궤도를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궤도가 서로 충돌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