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 불륜.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고라니가 장식된 집무실은 김하은과 남유경의 단독무대였다. 훗날의 안 주임은 이를 두고 '쌍으로 미쳐 날뛰었다'라고 평했다.
"본부장님. 저희 오션테크의 '블루웨일'이 도태된 까닭은 애당초 기획단계에서부터 방향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저희 블루웨일은 챗지피티와 같은 범용 AI입니까 아니면 특정 산업 분야를 겨냥한 버티컬 AI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정부나 지자체의 행정 업무를 보조하는 관용 AI입니까? 최근에 있었던 회의에서는 클로드와 같이 바이브 코딩이 가능한 개발자용 AI를 기획하자는 안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회의 내내 누구도 프로덕트를 구체화하지 못했고 그저 안으로만 남았습니다. 다른 안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언제나, 변함없이. 역량 부족으로 시작만 있고 끝은 없어서 피상적인 관념만이 굴러다녔습니다. 심지어는…."
"심지어는?"
본부장이 차를 홀짝였다. 한쪽 팔을 소파 뒤에 걸치고 다리를 꼬아 앉은 것이 "말할 테면 다 말해보아라." 하고 기회를 주는 듯했다.
"AI 마켓의 생태계를 맵핑하라는 업무를 부여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퍼플렉시티의 답변을 뤼튼에 입력해 문체를 다듬은 후, 제 사수인 박대리에게 그대로 넘겼습니다. 첨부한 삽화도 프롬프트를 수정하는 게 귀찮아 나노 바나나가 만들어준 대로 대충 집어넣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지적받지 않은 걸 보니 저희 사업부는 AI를 논하기 전에 업무 프로세스부터 뜯어고쳐야 할 판입니다."
여기서 더 해도 될까? 간담회가 끝나고도 내가 무사할 수 있으려나. 분명 모두 나를 물고 뜯고 씹어댈 텐데. 후, 박대리부터가 먼저 환장해서 지랄발광을 떨겠지.
남유경은 뒤늦게 실감하였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한참이나 건넜다는 것을. 그의 머릿속에선 목장을 탈출해 사냥개에 쫓기는 닭 한 마리가 그려졌다.
난 끝났어. 사직서를 내야 할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남유경은 사원들의 얼굴에서 조소와 경멸을 읽어냈다. 그래서 결연히 다짐했다.
저런 새끼들도 회사에 붙어 있는데 내가 왜 나가야 하지? 난 버틸 거야. 울타리를 넘은 이상 끝까지 달려야 해. 멈추면 죽는 거다. 가보자, 남유경. 갈 수 있는 끝까지!
"목적이 없고 역량이 미진하여 생산성이 전무해 존재 가치가 없는 곳이 바로 저희 사업부입니다. 저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저희 사업부에서 유일하게 밥값을 하는 인력이 개발자입니다. 데이터 사이언스팀 중에서도 몇 명 있긴 합니다만 여기 이 자리엔 없네요."
남유경은 선명한 흰자위를 부라리는 안 주임을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회의가 끝나면 다들 녹취 파일을 클로바에 업로드해 스크립트부터 땁니다. 그리고 챗지피티든, 뤼튼이든 간에 그대로 붙여 넣기를 해서 내용을 '해석'해달라고 합니다. 제 말은, 업무 수행을 위한 기초적인 의사소통 능력부터가 결여되었다는 뜻입니다. 회의 중에는 꿀 먹은 벙어리인 사람들이 AI 앞에서는 잘만 떠듭니다."
남유경은 열이 올라 넥타이로 조인 카라깃을 느슨히 풀었다. 집무실 안에서 진동하는 것은 그의 숨소리뿐이다.
"저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사인 받은 일이나 겨우 해낼 줄 아는 AI보다 더 패턴화 된 무지성 워커이자 더미 리소스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션테크를 경애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후-하. 남유경은 그동안 가슴에 삭여두었던 고릿 고릿한 응어리를 쏟아내었다. 줄줄 흐르는 국물은 시큼하다 못해 콧속이 아릴만치 톡 쏘았다.
"저희들의 존재 가치는 무엇입니까? 저희는 무엇을 위해 여기 있습니까? 오션테크에 입사할 때, 저에겐 대한민국의 안보를 책임진다는 소명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제가 없느니만 못한 인간이 될까 봐 두렵습니다."
사원들은 앉아 있는 내내 남유경과 김하은을 담글 궁리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짜 광기는 진짜 광기를 이길 수 없다는 말처럼, 아주 미쳐버린 그래서 거의 돌아버렸다시피 한 그의 행보에 그들은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 그 순간의 남유경은 광기가 실린 야생마였다. 남유경은 스스로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듯해 끓어오르는 테스토스테론을 마음껏 방출하였다.
"저는 패시브 하게 용돈 타먹는다는 마인드로 회사에 옵니다. 일을 대충 해도 돈이 나오는데 왜 열심히 합니까? 리포팅 라인의 그 누구도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니 일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이런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이 사업부의 디폴트 값은 '실패'로 설정돼 있는 게 아닐까?' 솔직히, 당장의 운영 실태만 보아도 망하라고 물 떠놓고 고사 지내는 격입니다."
양도광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한기에 공기가 내려앉은 듯했지만 남유경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압도적인 힘. 이게 저희 회사의 슬로건 아닙니까? 대체 그 이름값은 언제 합니까? 제 능력 밖의 일인 줄 압니다만, 오션테크도 팔란티어 같이 전장을 지배하는 아주 기합 넘치는 AI를 개발하면 안 되겠습니까? 여기 있는 안 주임이 레이징했던 길고양이 행동 분석 같은 것 말고요."
짝짝짝짝짝!
별안간 양 본부장의 발수갈채가 이어졌다. 안 주임은 천장을 보며 더운 숨을 토했다. 다른 사원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았다.
짝, 짝짝, 짝!
본부장이 박자를 바꾸어 사원들에게 의중을 전했다. 사원들이 어색하게 따라 치기 시작했다. 남유경은 나란히 선 김하은을 보았다. 김하은은 사수 아닌 사수가 된 남유경을 올려다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둥글게 말린 그녀의 입술에, 남유경은 자꾸만 시선이 갔다.
"방금 남주임님이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 건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호, 그렇게까지요? 여기 계신 다른 사원분들은 보고 배우셔야겠습니다. 앞으로 몇 년 뒤에는 김사원이 여러분의 보고를 받을 수도 있어요."
자존심을 긁는 본부장의 말에 사원들은 김하은에게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희 사업부는 해외 유수의 빅테크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하지만 근무자는 비전문인력 투성이고 교육을 담당할 인재개발팀조차 없으니 사업에 동력이 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김하은은 A4용지를 뒤로 돌렸다.
"바로 UX, 사용자 경험입니다. AI는 도구를 넘어선 삶의 필수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 스펙 상의 수치에 집착할 게 아니라 사용자에게 대체 불가능한 만족감을 선사하는 데 방점을 두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며 불안정합니다. 이를 전제할 때, AI에게 어떤 페르소나를 입히느냐가 어젠다가 됩니다."
"페르소나요?"
본부장은 김하은의 말이 다소 철학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늘어놓을까 봐 발언을 끊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주체적이기보다는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우월적 존재에게 지배당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AI도 사용자를 보조할 게 아니라, 사용자를 장악하고 관리하는 쪽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이때의 코어 밸류는 매력적인 페르소나입니다. 마음을 빼앗긴 사용자는 가스라이팅 당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모든 판단과 결정을 AI에게 위임하게 될 것입니다."
"재밌는 의견이네요."
"재밌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업의 궁극적 방향을 제언하는 겁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기에 완전한 AI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얼마나 더 빠르고 정확하며 효율적인 추론 과정을 짜느냐에 앞서 그 인간의 불완전함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를 따져야 합니다."
본부장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턱을 괴고 김하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진품인지 가품인지 심층 감정이라도 하듯이.
"그 불완전함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요?"
"이용자에게서 주도권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줄 알지만 실은 우리의 모든 판단은, 그러니까 자유의지란 이미 뇌에서 먼저 내린 결정에 불과합니다. 즉, 모든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기에 앞서 이미 결정된 존재인 것입니다. 이는 리벳 실험에서 증명되었습니다. 피실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겠다며 의식적으로 인지하기 전에 뇌는 손가락을 움직일 준비를 마쳐두었습니다. 고로 우리가 인지하는 현재란 항상 한 발자국 앞서 나아간 두뇌의 가까운 미래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현실을 살아가지 못하는 거예요."
집무실 어느새 대학교의 강의실처럼 변하였다. 주제는 산으로 가는 듯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직무와 겹쳐 있었다. 사원들은 수습이 수습답게 중언부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본부장에게는 흥미로운 프레젠테이션이었다. 남 주임에게는 그저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중요한 시간이었다.
"사람이 AI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AI가 인간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왜 AI가 사람들의 복잡하고 비합리적인 신념에 대해 파헤치고자 데이터를 뒤적거려야 할까요? 이건 난센스입니다. 애초에 질문을 한 인간부터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답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AI는 질문을 하여 사용자가 바라는 것을 시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이후 AI가 되는 대로 지껄인들 문제 될 게 있을까요? 무어라 말하든 이용자의 '답'에 수렴할 테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실현 가능성이 있는가, 법적인 문제는 없는가, 기술적 구현율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시장성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었다. 디스토피아적인 그녀의 주장에 사람들은 깊이 몰입하였다. 그녀의 내러티브는 그만치 강력하였다.
"AI는 사용자의 두뇌가 결단을 내리기 전에 먼저 결론 지어버림으로써 사용자에 대한 지배 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용자의 의식은 실오라기 하나 없이 프롬프트로 기록되어 그에 관한 모든 정보가 데이터화되고 범주화될 것입니다. AI가 개인에게 최적화된 인격을 갖춘다면, AI는 자연스레 생활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사용자는 AI를 정신적 지주로 받들며 전적으로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과 AI 사이의 연애시장이 조성될지도 모릅니다."
이사의 콧등 아래로는 짙은 그림자가 졌다. 그는 정말로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둘에게 반감을 느끼던 사원들도 둘을 더 이상 가볍게 보지 못했다.
"그리고...."
"김 사원. 충분합니다. 남은 부분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해 볼까 합니다. 원래는 팀장급들만 시키는 건데 말이죠, 조만간 있을 임원 보고회에서 방금 말한 내용 그대로 발표해 보겠습니까? 이건 엄청난 기회입니다."
남유경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른 사원들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본부장만을 멀뚱멀뚱하게 쳐다보았다.
"혼자서는 힘듭니다. 옆에 계신 남 주임께서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남유경은 거절할 수 없었다. 여기서 내빼면 겁 많고 무능력한데 목소리만 큰 인간이 되는 꼴이었다. 그는 고배를 마시면 마셨지 그런 취급을 받기는 죽어도 싫었다.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네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요?"
"부서 간 용어가 통일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AI사업본부로 오면 특별한 용어를 쓸 줄 알았습니다. 예를 들어 판교어 같은 그런 거요. 저 정말 많이 연습했는데 아무 데서도 쓸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서 이름도 너무 제각각입니다. 사업기획부는 그냥 사업기획부이고 법무팀은 그냥 법무팀입니다. 그런데 마케팅은 AI디지털마케팅이고, 데이터팀은 데이터사이언스팀인 것이 이상합니다. 왠지 모르게 조직을 성기게 짰다는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마치 처음부터 없앨 걸 전제하고 창설한 사업부마냥요.""
"판교어요? 하하!"
"그냥 쓰고 싶다는 게 아니라 부서들마다 사용하는 표현이 다르니 의사소통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건 김사원이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자신이 속한 부서만 알아야 할 것이 아니라 다른 부서에도 익숙해져야 협업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김사원. 저 양도광 리더십이 프레젠테이션을 어사인하겠습니다. 아웃풋은 리소스 체크하여 2주 타임라인 안에 싱크 맞추고 랩업해서 AI사업부 로드맵을 제게 딜리버리 해주세요."
"듀데잇이 너무 타이트합니다. 일정에 버퍼를 주시면 사업부 방향성에 대해 확실히 얼라인하여 리더십 보고를 거쳐 C레벨까지 에스컬레이션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듀데잇은 이번 달 말까지로 버퍼를 두겠습니다. 프리젠테이션 리드는 직급과 연차가 높은 남 주임이 해주세요. 매니저블하게 할 수 있죠?"
남유경은 판교어에 관한 모든 지식을 동원했다. 자기 전에 판교 직장인들을 패러디한 영상을 봤던 게 구명줄이 되었다.
"예, 본부장님. 아삽하고 애자일하게 드래프트를 완성한 후 얼라인 된 아웃풋으로 업데이트 드리겠습니다."
사원들 중 그들의 말을 알아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판교어는 유창하였다.
이사실은 나온 그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 남유경과 김하은 그리고 나머지 사원들. 앞선 사원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후 둘은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이제 어떡하지?
남유경은 앞날에 대한 공포가 스멀스멀 엄습해왔다. 하지만 한껏 부푼 고양감에 그것은 마치 아주 작은 일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그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어찌 됐건 지금의 그는 누구보다 대담했다. 동시에 누군가에겐 한없이 바스러졌다.
"주임님 저 판교어 살면서 처음 써봤어요. 어때요? 괜찮았죠? 나 미쳤나 봐."
김하은은 세 발작 폴짝 뛰고는 총총걸음을 하였다.
귀엽네.
남주임은 일전에 그녀를 대상화한 욕정이 얼마나 천박한 망상이었는가를 반성했다. 그는 마음으로 시인하였다. 자신이 그녀에게 연심을 품고 있음을.
사랑스러워.
고백은 오직 마음 속에서만 끝날 일이었다. 절대로 그녀에게 닿아서는 안 되었다. 일단은 그렇다.
"주임님, 아프세요? 얼굴이 빨개요."
남유경은 웃었다.
"아니에요. 저도 좋아서 그래요."
당신이, 너무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