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김 프로. 계속하세요."
양 본부장은 손가락 끝이 서로 맞닿게 두드리며 건너편의 김하은을 마주 보았다. 똬리 튼 그녀의 생각이 몹시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본부장님. 제가 대신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데이터 사이언스팀의 안 주임이 나섰다. 양 본부장은 안 주임을 보며 눈썹을 한껏 치켜올렸다. 기가 죽은 안 주임은 고개를 숙인 채 본부장의 허리 벨트만을 겨우 바라보았다. 다른 사원들도 할 말만 떠올릴 뿐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저는 말이죠."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이런 게 싫어요."
한껏 찡그린 본부장의 얼굴은 몹시도 노골적이었다. 그 압박감에 남유경의 마음에선 풍랑이 일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촌극은 박대리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한 그의 소심함 때문일지도 몰랐다. 생각이 그리 미치자 남유경은 감정이 요동쳐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비합리적인 죄책감은 그의 지병을 도지게 했다. 얼마 안 있어 "삐-" 하는 소리가 고막을 타고 들어오더니 그의 머릿속에서 무진장 메아리쳤다. 각막은 파란 필터를 쓰기라도 했는지 사물의 빛깔을 서늘하게 투영하였다. 급속도로 예민해진 감각에 남유경은 등짝의 식은땀이 참기 힘들 정도로 불쾌했다.
힘들어. 죽고 싶어.
남유경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필사적으로 정신줄을 동여맸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누른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분출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외쳐버렸다.
"저도 싫습니다!"
"남주임. 대체 무엇이 싫은가요? 똑똑히 얘기하세요!"
"답은 정해져 있고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할 말 못 할 말 가리느라 머리 싸매는 꼴이 우습습니다!"
남유경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우뚝 서있었다. 사원들은 넋이 나갔는지 입만 크게 벌린 채 말 한마디조차 못하였다. 반면에 양 본부장의 부리부리한 눈동자에선 흡족함이 용솟음쳐 생기가 그득하였다. 남유경은 손과 발에서 고동이 일었다.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고 실내화 안에선 발바닥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렇게 식어가던 중, 한 줄기 햇살이 비쳐왔다.
김하은이었다. 그녀가 남주임을 향해 살포시 지은, 그 없는 듯이 있는 미소는 말 그대로 얕고도 깊었다. 남유경은 조금씩 그녀를 향해 몸을 틀기 시작했다. 나이와 직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과 마음은 김하은이라는 버팀목 없이는 고사해 버릴 처지였다.
잔뜩 저질러버린 남유경에게 돌아갈 곳은 없었다. 반드시 여기서 승부를 봐야 했다. 그는 아예 거센 파도에 올라 타기로 작정했다. 일렁이는 윤슬 사이로, 선의 경계가 흐려진다.
"제가 추구하는 회의가 바로 이런 회의입니다!"
양 본부장이 책상을 "쾅!" 하고 내려쳤다. 찻잔이 딸그락 대며 책상 위에서 반 바퀴를 돌았다.
"다른 사원들은 둘을 보고 마인드부터 리셋하세요. 이 자리에서조차 서로를 감시하는 저의가 대체 뭡니까? 누가 시키기라도 했습니까? 대리, 과장, 차장 아니면 팀장인가요?"
사원들은 그 말에 긍정하면서도 한사코 도리질하였다. 그래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입을 틀어막지 마세요! 저희 사업부가 그렇게 폐쇄적인 조직이었나요? AI도 찬밥 더운밥 마다하지 않고 딥러닝하는데 우리는 뭡니까? 회사에서 제일 나쁜 게 뭔 줄 알아요? 바로 '답'이 있는 회의입니다. 그건 회의를 가장한 통보예요. 개방이 아닌 폐쇄라고요! 다들 젊잖아요. MZ 아닙니까? 저도 MZ예요. 그런데 저도 안 하는 꼰대짓을 여러분이 하니 기가 찹니다. 서 있는 두 분, 지금이 기회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전부 꺼내세요. 허심탄회하게!"
"기회를 주셨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김하은은 적어온 것을 보며 간담회의 포문을 열었다.
"AI사업본부의 창립 목적을 모르겠습니다. 누가 봐도 여기는 총체적 난국입니다."
안 주임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곁에 앉은 법무팀의 정 사원이 제지했다.
"안 주임, 정 사원. 학창 시절에 예절 교육을 이수하지 못했나요? 잠자코 그냥 들으세요. 발언권은 김사원에게 있습니다. 김사원, 주눅 들지 말고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툭 까놓고 말해서, 이곳에 전문성이 있는 인력이 있나요? 개발이랑 데이터 팀 그리고 사업기획부의 강팀장님 빼고는 직무와 관련해서 제대로 아시는 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부분 수박 겉핥기식 지식만 갖고 있어 보고서 제출이나 겨우 해낼까 말까 합니다. 거기에 과연 생산적 가치가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용지 위에 잉크로 떡칠된 낱말 맞추기에 불과합니다."
"남 주임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본부장의 기대가 남유경에게로 옮겨갔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핑핑 돌다 못해 이미 전두엽이 마비되어버렸다. 뒤죽박죽이 된 사고체계 하에서, 남유경은 이사의 말에 그대로 동의할지, 아니면 조금은 다르게 답할지, 그것 조차 아니면 그냥 가만히 서있을지,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다른 사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할지, 하다 못해 나오는 대로 뇌까려야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어 우유부단함만이 극에 달하였다. 그 자리에서 본부장이 윽박이라도 질렀다면 남주임은 급성 공황 장애로 혼절해 버릴지도 몰랐다.
"주임님, 이거 그냥 브리핑!"
그녀의 말에 남유경의 심장은 제 리듬을 찾아 뛰었다. 김하은은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할 수 있지?" 하며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했다. 남유경은 그런 그녀가…. 예뻤다.
내가 미쳤지!
이성에 대한 본능적 이끌림은 순식간에 죄책감으로 변질되었다. 남유경은 약혼녀가 있으면서도 나란히 선 여직원의 외모에 취했다.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인간 실격이었다. 남유경은 자괴감 속에서도 끝없이 김하은을 의식했다.
앞에서 어버버 거리면 내가 얼마나 같잖아 보일까? 직급으로 보나 연차로보나 내가 하은 씨보다는 높잖아. 그러니까 최소한 1인분은 해야 해. 제발 정신 차리자, 남유경!
남유경은 순전히 업무상의 이유로 김하은을 다시 바라보았다. 심장이 떨리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그녀로 하여금 불어난 용기의 무게가 모든 혼란을 잠재웠다. 남유경은 자신이라는 그릇에 김하은에게서 우러난 동경심을 담았다. 얼마 전 그녀에게 성욕을 품었던 일이 부끄러워졌다. 다시 생각해도 인간 실격이다.
이제 김하은을 향한 남유경의 관심은 비단 관심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었다. 바로 호감이었다. 남유경은 김하은의 육체가 아닌 김하은이라는 사람에게 스며들어버렸다.
하은 씨는 온전히 자신으로서 빛나는 사람이야. 나라고 안 될까? 그러니, 나를 넘어설 파격이 필요해.
그렇게 남유경은 선을 넘었다. 아주 부러뜨리고서는 멀리 던져버리기기까지 했다!
"본부장님. 저도 그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출근할 때마다 회사에 일하러 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터디 카페에 교양서적이나 읽으러 오는 감각입니다. 그에 반해 개발자들은 일을 참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저번에 커피 자판기 앞에서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니 "라벨링에 따라 데이터를 분류한 후 프롬프트를 설계하여 파라미터를 조정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남유경은 크게 심호흡한 뒤 말을 이었다. 떨리는 목소리 속에서 남유경은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솟구치는 힘을 만끽하였다. 움츠렸던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듯이.
"저는 원래 방산 사업부의 기획팀에서 국방부 보고서를 분석하여 신무기 수주 전략을 짜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뜸 이동 배치를 받고서는 전공 지식 없이,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AI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사업부의 인력 대부분이 저와 같습니다. 그래서 생산성이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다들 개발부에서 노티한 내용을 파악하는 데만 급급하여 업무적으로 연계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남주임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부전공이 경제학이었습니다. 엔지니어링과는 연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입사 전날 인사관리팀에서 연락이 와선 이곳으로 배정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 와서 직무교육이라곤 일주일 받은 게 전부이고 앞으로 무엇을 마케팅하고 어떤 가치를 고객들에게 설득해야할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아랫것들의 묵은 불평불만에도 양 본부장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남주임이 보기에 본부장은 확실히 뜰떠있었다. 남주임은 불안을 떨쳤다. 한껏 벌어진 어깨가 더할 나위 없이 당당하였다.
나머지 사원들은 쓰러진 병풍 마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부작 사부작. 그들의 불안 심리가 산만히 들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