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엘리베이터 홀에는 각 부서의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직급은 사원, 주임으로 저경력자들 뿐이었다.
드르륵.
자동문이 열리며 박대리가 등장했다. 박대리는 늘어선 직원들을 보며 속으로 한숨지었다. 본부장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단들을 불러 모으시는 거지?
"남주임님, 저 좀 볼까요?"
박대리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려던 남유경을 불러 세웠다. 남유경은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돌아섰다.
"예, 대리님. 무슨 일이실까요?"
박대리는 폼을 잡는 양 사원들 앞에서 남유경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남유경은 당장에라도 사수의 역겨운 손바닥을 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으로 끝날 일이었다. 남유경은 가만히 있었고 박대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으며 양해의 말을 전했다.
"남주임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자신의 등을 가볍게 두르는 박대리를 보며 남유경은 저주를 퍼부었다.
재수 없는 놈. 꼴에 이미지 관리는 하나 보지? 말 예쁘게 하는 것 좀 봐. 입을 확 잡아 째버릴 수도 없고.
박대리는 남유경을 탕비실로 데려갔다. 가는 동안 남유경은 박대리의 뒤통수를 보았다.
이 새끼 탈모 있나? 꼴좋다.
탕비실에 도착한 남유경을 두 손으로 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공손히 닫았다. 그리고 여쭈었다.
"대리님, 혹시 하실 말씀이…."
"잘하시라고요, 제발."
왜 또 지랄이지?
"제 속이 좁아서 노파심에 하는 말이에요. 지금 부서 분위기가 나쁩니다. 과장님이랑 차장님은 부장님 호출로 회의실에 가셨는데 언제 돌아오실지 모릅니다. 다른 부서들도 상황이 얼추 비슷하고요."
"예, 말씀해 주신 부분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따로 노티 하실 게 있으실까요?"
"주임님."
"예."
박대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남유경은 잡도리가 시작되겠거니 했다. 자신보다 2살 어린놈에게 훈시를 당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주간 행사처럼 꾸준히 당해왔음에도 소감은 일관되게 고까웠다. 어찌 된 일인지 연차가 쌓일수록 부아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남유경은 사회인이었고 스스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처세에는 따라야 할 정석이 있었다.
"이제 대리 다실 때가 됐잖아요. 승진까지 2주도 안 남은 것 같은데요."
"네, 맞습니다."
그래 새끼야. 너나 나나 이제 대리라고. 그만 좀 해!
"그러면 제가 일일이 노티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맞게끔 하실 수 있어야죠. 언제까지 시킨 일만 하시려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버러지 새끼.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너보단 먼저 과장이 돼주마.
"저기 엘리베이터 앞에 대기 중인 애들이요. 참…. 저도 대리 주제에 이런 말 하는 게 무안하긴 한데요, 전부 햇병아리들이잖아요."
"맞습니다."
"그중에서 남주임님은 연차가 제일 높고요."
얘가 나를 돌려 까고 있나? 그 연차에 아직도 주임인 거냐, 뭐 이런 뜻인가?
"본부장님께서 남주임님을 콕 집어서 이런저런 질문들을 하실 수도 있어요. 그땐 상황에 맞게끔 요령껏 처신해 주세요. 괜한 말을 꺼내서 안 그래도 뒤숭숭한 분위기 더 어지럽히지 마시고요. 제가 정말로 부탁드릴게요. 옆에 딱 붙어서 사수가 하나하나 명령어를 입력해줘야 할 그런 시기는 지나셨잖아요? 남, 유, 경 대리님?"
이 새끼는 내가 대리가 된 후에도 이럴까?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예, 박대리님. 노티 하신 부분 잘 인지했습니다."
"그나저나 저번에 공부하라고 한 건 하셨어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걸까요?"
"LLM이 뭐죠?"
"그, 그건...."
몰라, 이 개새끼야!
"하아…. 업무가 어려울 순 있지만 직무수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은 항시 숙지해야 하지 않겠어요?"
"말씀하신 부분은 제가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근데 LLM이 무엇일지 여쭈어도 될까요?"
박대리의 입술이 가지런히 정렬되었다. 남유경의 작은 복수가 성공한 것이다.
자기도 잘 모르면서 딴에 문자 쓰기는….
"시간 없으니까 얼른 가세요. 마지막으로 별 일은 아니고, 하나 더 노티 해드릴게요."
"예."
얼른 가라며? 빨리 보내줘!
"마케팅부의 김하은 씨 아시죠?"
김하은. 그 이름에 남유경은 짜증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쿵쿵 쿵쿵. 남유경의 심장이 어느덧 리듬을 바꾸었다. 자신이 박대리의 말에 이토록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가.
"다른 건 아니고요. 그냥 조언 같은 느낌으로 하는 말입니다. 겉보기와 달리 하은 씨가 좀 많이…. 낭창낭창하다는 말을 들어서요. MZ가 봐도 MZ 스럽다나? 아무튼 꽤 독특한 캐릭터예요."
꼴에 사리기는. 뒷담을 깔 거면 당당히 깔 것이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김하은 사원이 신입이다 보니 간담회 중에 의욕이 많이 넘칠 수도 있겠죠? 그러면 적절히 잘 끊어주세요.'
"네."
그건 되지도 않는 지시였다. 한낱 주임 따위가 어찌 이사의 간담회를 주도하겠는가? 보나 마나 박대리는 잘 되면 자기 덕이고 아니다 싶으면 부사수에게 덮어 씌울 요량일 게 분명했다. 남주임은 그 정도 연차에 일을 해결하기는커녕 키워서 온다고 말이다.
"얼른 가보세요. 다들 기다리시네요."
남유경은 목례를 한 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대기 중이던 사원들은 홍해바다처럼 갈라져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남유경을 중심에 세웠다. 그 소리 없는 압박에 남유경은 달리 수가 없었다.
"출발해 보실까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려던 찰나, 남유경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한 명이 없었다. 지난밤, 그를 잠 못 들게 한 데에다 아내 곁에서 부정한 욕망을 일으켰던….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동문이 열리며 20대 후반의 사원이 뛰쳐나왔다. 바로 김하은이었다. 남유경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응시했다. 곁에 선 타 부서의 직원들은 무주의 맹시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카페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의 시선을 끌었다. 헝클어진 듯하여도 한 올 한 올이 그것이 제 자리인 냥 절묘하게 흩어졌다. 부스스한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만 그리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원들은 남유경의 곁을 스치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남유경은 그녀가 탈 때까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꾹 눌렀다. 그녀가 탄 것을 확인하고서야 남유경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박대리는 왜 김사원을 언급했을까?
남유경은 박대리를 핑계 삼아 그녀에게 온 신경을 기울였다. 뿌린 향수, 입은 옷, 손에 든 스마트폰의 액세서리 같이 그녀에 관한 모든 것에 감각이 활짝 열렸다.
이어서 그는 허리를 곧추 세우고 가슴을 넓게 펼치더니 서류 다발을 움켜쥐어 손등에 핏줄을 세웠다. 꽉 잡힌 그의 모습은 빳빳하게 각을 세운 듯했다. 남유경은 층수를 확인하는 척하며 마무리로 매끈한 문을 거울삼아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무심한 듯 툭 털어 정리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김하은이 그에게 인사하며 웃음을 피웠다. 언뜻 보기에 그녀는 이사와의 만남이 가지는 무게감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남유경은 그런 천진난만함이 신선했다.
그녀는 다른 직원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비단 겉치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의 옷차림새를 칭찬하거나 회사 앞 화단에 핀 개나리에 관한 소감까지 곁들였다. 어찌 보면 때와 장소에 다소 맞지 않는 행동일 수도 있었다.
사원들은 단답형으로 대화를 일축하거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그가 보기에 그녀는 진정한 의미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차가운 반응에도 주눅 들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특이하네. 이렇게 붙임성이 좋긴 힘들 텐데.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임원층은 중력이 다르게 작용하기라도 하는 듯 공기부터가 무거웠다. 남유경은 내리기도 전에 어깨가 아려왔다. 반면에 김하은은 달랐다. 입술이 옹달샘을 머금은 듯 마냥 생글생글하여선, 해맑고 산뜻하며 한없이 싱그러운….
리트리버. 골든 리트리버.
금빛의 일렁임이 칙칙한 회색 엘리베이터를 환히 비추었다. 남유경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주임님. 오늘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예. 방금 그런 일이 생긴 것 같아요."
간담회 따위,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박대리의 신신당부는 깨끗이 잊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