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사무실에 도착한 남유경은 하품을 뱉으며 업무를 개시했다. 그는 컴퓨터가 부팅되는 동안 달력을 보며 일정을 체크했다. 오늘은 비교적 여유로운 날이다. 어제 회의에 대한 안건을 제출하는 것 빼곤 특별한 이슈가 없다.
[이용자 친화적 AI 페르소나의 일관성 유지를 위한 파라미터 제어]
남유경은 딴에 거창한 제목을 정하여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겼지만 정확히 무엇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지 자신조차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AI 사업기획팀으로 부서를 이동당한 뒤로는 자질에 전혀 부합하지 않은 일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속에서는 우는 소리밖에 안 나왔다.
고등학교 문과 출신에 대학에서 철학과를 전공한 그로서 AI는 온통 난해한 것 투성이었다. 흔히 철학이 학문의 어머니라고들 하지만 철학을 전공했다고 하여 모든 학문에 정통하리란 건 크나큰 착각이다.
남유경은 자신이 뜨개질을 하는 미련한 곰 한 마리처럼 여겨졌다. 둔탁한 손바닥에 무슨 재주가 있어 실을 섬세하게 엮겠는가? 그 또한 다를 바 없었다. 남유경은 컴퓨터 과학을 전공한 '똑똑이' 개발진들의 프레젠테이션에다가 챗지피티에게 얻은 지식들을 얼기설기 엮는 중이었다. 결과물이야 당연히 실속이 없는 정돈된 쓰레기일 것이 자명했다.
툭 까놓고 말해, 그는 양심껏 생각하기에 당장 해고된들 할 말이 없었다. 프린터기 앞에 서서 출력물을 철할 때마다 지구의 자원이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떠한 생산적 가치도 창출하지 못한 채 버려진 펄프화된 나무들…. 아, 가엾어라.
그래도 남유경에게는 한 가지 행운이 있었다. 바로 그의 사수 또한 속칭 '돌대가리 문돌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업무에 똥을 싸도 사수는 그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이따금 기강을 잡는답시고 되지도 않는 전문용어를 남발할 때엔 얼굴에 주먹을 꽂아주고 싶었지만 그때만 사람 좋은 얼굴로 참아내면 될 일이었다.
남유경은 어떻게 이딴 인원 구성으로 AI개발본부가 창설됐는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쩌면 그가 속한 회사는 대한민국 최고의 자선사업단체일지도 몰랐다. 대체 돈은 어디서 나는 걸까? 남유경은 보고서를 쓰다 멈추고 나무 위키에 접속했다.
[역사]
'딥호라이즌오션테크'(이하 오션테크)는 본래 선박 건조 회사였다. 1대 회장의 맏아들, 오석천이 경영승계를 받은 후로 오션테크는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했다. 그중 방위 산업에서 큰 성과를 보이는데, 고속정과 이지스함의 건조에 참여하여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다.
방산업계에서 청사진을 발견한 오석천 회장은 국방과학연구소와 연계하여 무기 체계의 연동성에 관한 각종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이후 오션테크는 정부의 국방개혁에 따른 국책 사업을 줄줄이 따내어 자주포, 함정, 전투기 등 각종 무기에 탑재될 핵심 부품들의 국산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엔진의 추력 조절을 위한 컴퓨팅 시스템의 집적 회로에 관한 특허를 취득하였는데 이는 대한민국에서 운용되는 첨단 무기들에 빠짐없이 활용되고 있다.
오션테크의 부품이 탑재된 무기들은 전 세계 24개 국에 수출되고 있으며 회사의 주가는 근 10년 간 700% 이상 폭등하였다. 이에 힘입어 오션 테크는 미래의 먹거리를 위한 사업 다각화에 나섰는데 최근에는 AI사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성과는 매우 지지부진하여 제조업 역량이 AI 개발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슬픈 반면교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이다.
설명에 따르면 남유경이 속한 AI사업본부는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언제 사업이 통째로 날아갈지 모를 판이다. 그럼에도 여태 사업은 유지되고 있다. 대체 얼마나 돈이 썩어 넘쳐나길래? 정답은 이어지는 글에 일목요연하게 서술돼 있었다.
오션테크는 IMF 시절에 국내의 주류회사들을 인수하였다. 국내 1위 소주회사인 JK가 오션테크의 계열사이며 든든한 캐시카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돈맛을 본 오석천 회장은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브랜드 '콕핏아일랜드'를 인수하여 세계 시장 점유율을 3위까지 끌어올렸다. 이어서 고급 막걸리 브랜드 '온밤'을 론칭하여 일본, 중국, 대만에 수출하고 있으며 매출이 꾸준히 우상향 하고 있다.
이렇게 보니 그의 월급은 물론 대한민국의 AI개발을 책임지는 역전의 용사들은 오션테크의 사원들이 아니라 매일 밤 알코올을 들이켜는 직장인들의 애환이 아닐까 싶었다. 그들이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오션테크의 미래는 밝아지고 임직원들의 직업 안정성은 증대될 것이다. 그는 새삼 출근길에 마주친, 숙취에 찌든 이름 모를 직장인들이 고마워졌다.
뒤에서 누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푸슥-푸슥. 쿠션에 공기 빠지는 소리로 보아 그의 사수가 분명했다. 그는 나무위키를 끄고 보고서에 무의미한 말뭉치를 다시 이어 붙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 남유경에게 실재하는 것은 타건감뿐이다.
"남주임님, 어서 일어나세요. 메신저 못 봤어요?"
"예?"
"하, 정말 왜 그러는 겁니까? 긴급회의가 잡혔습니다. 제가 출근하면 메시지부터 확인하라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2살 어린 사수의 타박에 남유경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나빠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꼬우면 일찍 들어와서 승진을 했어야 할 일이다. 보수적이고 수직적인 회사 문화를 탓할 것은 아니다. 남유경은 서둘러 메신저를 확인했다.
<중요> [공지] 양도광 이사 주관 AI 전략 TF 및 관련 개발 유닛 긴급 소집
양도광.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회사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이사에 오른 입지전적의 걸물이었으나 승진 과정이 그다지 정명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다. 하지만 상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그런 그가 한 달 전쯤에 쓴 물을 들이켜고 있는 AI사업본부의 본부장으로 부임했다. 각종 우려가 들끓었으나 다행히 기우였다. 적어도 말단 사원인 그로서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지난 회식 자리에서 맞은편 테이블의 연구개발부의 팀장이 본부장의 이름을 두고 칼 '도' 자에 미칠 '광'자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소맥을 곁들인 일이 있었다.
남유경이 사수를 따라 회의실에 들어가던 찰나, 메신저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중요> [재공지] 양도광 이사 주관 AI 전략 TF 및 관련 개발 유닛 긴급 소집 취소
메시지를 클릭하니 소집 대상은 팀장급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이슈가 있어서 소집이 번복된 것일까? 하긴, 칼 '도' 자에 미칠 '광' 자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겠거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