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남유경은 자리에 앉아 업무를 재개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그는 파티션 위로 머리를 내밀어 좌우를 살폈다. 모두 제 할 일을 하느라 바빠 보였다. 남유경은 웅크린 자세로 사내 인트라넷에 로그인하고선 마우스 휠을 재빨리 굴렸다. 드르륵, 드르륵. 그의 검지 손가락은 쉴 틈이 없다.
알랑 말랑한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내는 건, 정말이지 손끝 위로 아슬아슬하게 날갯짓하는 나비를 움켜쥐는 일처럼 감질났다. 하지만 나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곡예비행을 펼치며 발 밑의 사내를 희롱하였다. 남유경이 그녀의 성씨라도 기억했다면 이리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카페에서의 재잘거림에 무신경했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작은 일이지만 이미 깊이 스며들었다. 그의 머릿속이 온통 흐려졌다.
남유경은 망막을 스치는 명단의 잔상조차 꼼꼼히 체크하였다. 타오르는 애간장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다. 곁을 스치는 직원들의 눈에는 다소 산만한 동료로 비칠 뿐이다.
그런데 화면이 갑자기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파티션에서도 탄식이 터져 나오는 걸 보아 서버 이상이 분명했다. 시설관리팀은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때에!
남유경은 곤두선 신경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컴퓨터는 밀린 스크롤을 처리하느라 혼자서 화면 위아래로 한참을 날뛰었다.
빨리 고쳐져라, 빨리 고쳐져라. 이 망할 것아. 남유경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복잡한 일을 떠맡을 때 화가 나는 것이 회사생활이라지만 쉬운 일이 제때 해결되지 않는 것 또한 각별한 의미로 분노를 일으킨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일 분하고도 이십여 초가 지났을 때 그는 다시 마우스를 움직였다. 다행히 정상적으로 작동하였다. 남유경은 다시 그녀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그만이 아는 불경함을 가득 안은 채.
왜 이렇게 안 보이지? 부서는 어디였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1층에서 떠들 때 좀 잘 들어놓을 걸. 이 개 같은 회사에 직원은 뭐 이리 많아?
그러다 한순간 그의 눈이 번득였다. 인사 목록을 조회하던 검지 손가락은 공중에서 잘 고정된 조형물 마냥 완전히 정지했다.
사원 김하은[마케팅부]
후-하. 남유경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느덧 그의 이마께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키보드 자판에 톡- 하고 떨어지자, 남유경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느꼈다. 볼에 따귀를 맞은 양, 열감이 얼얼했다.
그는 참으로 처절하게 또 찌질하게 그녀의 이름을 갈구했다. 눈앞에 도라에몽이 있었다면 이름을 알려주는 도구를 달라고 사정사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21세기의 사람이었기에 컴퓨터에게 구걸했다. 얼른 정상적으로 작동해 줘. 나 급하단 말이야.
남유경은 그 꼴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추태를 부린 것만 같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내 가슴이 갑갑해져서는 마음까지 먹먹해졌다. 그는 휴대폰을 켜서 홈화면을 띄웠다. 거기엔 그의 약혼녀가 환히 웃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신선한 이름이 몹시도 파릇파릇하여 한아름 품에 안아 들고 싶었다.
김하은.
남유경은 한 글자 한 글자를 혀끝에 올려보았다. '김'. 어느 이름과도 어울리는 성이다. 그리고 '하'. '하-' 하며 숨을 들이쉬면 폐부 깊숙이 하늘하늘한 봄바람이 밀려들어왔다. 그 목넘김은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흩어질 듯 가볍고 싱그러운 공기의 맛이었다. 남유경은 그 자극적인 '설렘'을 한입 가득 머금은 채 창밖을 보았다. 빌딩 숲 너머의 강변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길게 내쉬듯이 '은'. 그의 코와 입에서 더운 숨이 한가득 밀려 나왔다. 달콤한 향이 분분하다.
아직 업무를 미처 다 끝내지 못했다. 남은 시간 동안 집중한다면 정시에 퇴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의 약혼녀가 늘 그랬듯, 도착 시간에 맞춰 저녁을 차려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봄빛을 따라 들판을 떠돌고 있었다.
"나도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군."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들뜬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녀가 이토록 아른거리지? 그는 문득 영화 '하녀'의 대사가 떠올랐다.
남자란 나이가 많을수록, 젊은 여자를 놓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겨우 32살이었다. 콘텐츠로나 소비될 법한 음탕한 중년 남성이라기엔 너무 젊었다. 남유경은 자신이 추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홍보부의 김하은을 놓고 오락가락하는 이 낯선 마음이 주체가 안 될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멜랑콜리한 야릇함을 만끽하였다. 약간의 죄책감은 딸려오는 덤이다.
결국 그는 퇴근 시각을 한참 넘긴 오후 8시에 근태 카드를 찍었다. 약지에 낀 반지가 오늘따라 유난히 조여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