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불륜(1) : 이름이 뭐였지?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 불륜.

by 봉봉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회의를 마친 남유경은 1층 카페로 향했다. 입사한 지 어언 3년 차지만 여전히 회의 시간은 고되었다. 당장 입 안에 단 물이든 쓴 물이든 시큼한 물이든 간에 뭐든 들이키지 않고서는 남은 업무를 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10분 거리에 있는 대형카페에 가서 농땡이를 피우고 싶었지만 그럴 배짱은 없었다. 그에게 허락된 여유는 한 잔 2500원의 저가형 아이스 아메리카노뿐이다.


거기서 남유경은 1년 차라 하기에도 민망한 수습 2개월 차의 직원을 마주쳤다. 수습 직원은 남유경을 보자마자 해맑은, 어쩌면 그저 잘 사회화된 행동 양식에 불과할지도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허리를 30도 정도 꺾어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녀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늘어졌다. 이윽고 허리를 세워 직장 선배를 마주 하니 갸름한 턱선 위의 조막만 한 얼굴이 피어올랐다. 하이얀 피부 위로는 찰랑이는 머리카락이 다소 어지럽게, 그런데 그 헝클어짐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어울리다시피 했다.


붙임성이 좋아서일까 어색함을 참지 못해서일까. 그녀는 머리카락을 정리하곤 커피가 나오는 동안 스몰 토크에 운을 띄었다. 하지만 남유경은 그녀가 한 말을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다.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한 차에 정신은 그녀의 초승달 같은 눈매에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습 직원의 눈웃음을 보며 각했다.


사람이 밝네.


수습 직원은 맡은 업무의 애로 사항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했다.


"저는 업무에 영 소질이 없나 봐요. 아직도 제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감이 안 잡혀요."


이어서 일상생활에 대해 얘기했다.


"집에 가면 너무 피곤해요. 그래도 생산적인 취미 하나는 가져야 할 텐데요."


솔직히 남유경은 그녀의 느닷없는 TMI에 별 관심이 없었다. 끽해야 사무실을 오가다 마주쳤을 정도인 사이에 나올 법한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아무나 붙잡고 짓눌린 스트레스를 배출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남유경은 그런 여사원에게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 반응해줄 뿐이었다.


그렇다고 또 완전히 무관심하진 않았다. 그는 그녀와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이 흥미로웠다. 남유경의 뇌내 망상에서는 그녀에 대해 보다 알고 싶다는, 래서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헤픈 욕망이 일었다.


하지만 사회생활 중 섣부른 호감의 표시는 사회화가 덜 되었음을 증명하는 꼴 밖에 되지 않았다. 또 타부서의 여직원에게 껄떡댄다는 이미지를 회사에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결코 다른 여자에게 업무 이상의 의미를 갖고 다가가서는 안 되었다.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남유경은 무미건조하게 인사를 건넨 뒤 종종걸음을 하였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뒤돌아 서서 말했다.


"커피는 3시 30분쯤에 사러 나오는 게 좋아요."


카페를 나오던 수습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루이보스 티에서 김이 일어나고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달아오른 찻김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하였다.


"뭐, 그냥 편하라고요. 이 시간대에 사람들이 적어요. 괜히 팀장님이나 대리님들 만나면 피곤하잖아요."


남유경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는 13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수습 직원이 따라붙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둘은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4층, 8층, 9층…. 층수가 올라가는 동안 둘은 침묵했다. 하지만 소란스러웠다.


남유경의 시선은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에 고정돼 있었다. 동시에 그의 점잖지 못한 눈동자는 좌측 시야 너머에 있는 그녀의 자태를 자꾸만 좇았다. 하지만 여성의 촉은 으레 남자들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법이다. 그는 남유경의 같지 않은 곁눈질을 간파했다. 신입사원은 차를 홀짝이며 내려온 머리카락 틈 사이로 남유경의 손가락을 살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도착했다.


"저는 여기서 내려요. 수고하세요."


그렇게 신입 사원은 짧은 목례를 남기고 엘리베이터를 떠났다. 남유경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까지의 5초 남짓한 시간 동안 그녀의 뒤태를 선명히 스캔하였다. 길게 뻗은 다리는 마치 실력 좋은 조각가 빚은 듯이 모양마저 훌륭하여 그의 마음을 온통 휘저어 놓았다. 심지어는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대는 상상마저 해버릴 정도였다.


남유경은 본능에 시인하였다. 그녀는 아름답다고.


엘리베이터가 남은 1층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남유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호주머니를 더듬었다. 거기에는 카페에 가기 전 손을 씻느라 넣어 둔 약혼반지가 있었다. 어쩌면 결혼반지가 될지도 모를 것이었다. 그는 반짝이는 둥근 금속을 왼손 약지에 끼웠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반지를 좌우로 돌려가며 매만졌다. 문이 열리고, 그는 떠올렸다.


이름이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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