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불륜(5) : 양도광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by 봉봉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양도광 이사의 집무실에 부서별 팀장들이 줄지어 앉았다. 양도광은 책상 위에 다기를 꺼내어 놓고는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면서 진한 홍차 향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마시지 않았다. 권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향을 내기 위해 찻잎을 우렸다.


양도광은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을 손가락으로 쭉 훑고선 책장 마지막 칸에 빼곡히 들어찬 레코드 판 앞에서 멈추었다. 그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레코드 판을 건리고는 개중의 하나를 꺼내어 턴테이블에 올렸다.


끼이-익


음악이 재생됐다. 양도광은 보란 듯이 레코드판의 자켓으로 부채질을 했다. 앨범 이름은 '시가렛 애프터 섹스'였다. 하지만 팀장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책장도, 레코드 판도, 양도광 이사도 아닌 벽에 고정된 박제된 고라니였다. 저 고라니는 로드킬을 당했을까? 팀장들은 고라니가 벽을 뚫고 나온 듯해 소름이 끼쳤다.


다시 봐도 미친놈이군.


사업기획부의 강한솔 팀장은 이 자리가 몹시 거북하였다. 오랜 사회생활로 윗사람을 대하는 데에 이골이 난 그이지만 양도광 이사만큼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회사는 본디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으로 모든 판단과 실행은 실직적인 이익과 결부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아는 양도광 이사는 매출이나 순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양도광을 부리는 윗선들이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전 본부장인 임지현 이사는 양도광 이사를 거론하며 업무를 잘한다고 승진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모든 거대한 조직에는 궤를 달리하는 캐릭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적어도 오션테크에서는 그랬다.


"강팀장님. 회사는 창업주가 아닌 법인으로 대표되는 집단이지만 결국 인간에 의해 운용되는 지극히 인간적인 집단이에요. 그러니 회사는 누군가의 아바타일 수밖에 없는 셈이죠. 사람이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듯 회사에서도 간혹 통상적인 논리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강한솔은 임지현 전 본부장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의 말에 비추어보면, 양도광 이사의 모든 기행에는 어떤 '의도'가 도사리고 있을 공산이 컸다. 양도광은 오늘 긴급회의를 개최하고는 돌연 취소해버렸다. 이는 누가 보아도 구설수에나 오를 짓이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한솔은 그 철저히 계산된 행보가 의뭉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파훼하기에는 양도광과 강한솔의 격차는 너무나도 컸다. 양도광은 회사의 주역들이 곁에 두고 쓰는 유용한 장기말이었다. 반면에 강한솔은 끽해야 앞에 나섰다가 죽으면 그만일 '병'에 불과했다. '병'이 '장군'의 속내를 알 리가 있겠는가? 설령 알지언정 반드시 몰라야만 했다.


"아무래도 음악을 끄는 게 낫겠네요. 원래는 제 마음을 무척 편안하게 해주는 곡인데 지금은 좀 그렇군요. 갑자기 왜 이럴까요?"


양도광은 턴테이블의 OFF 버튼을 누르곤 팀장들을 가로 보았다. 팀장들은 고개를 숙였다. 집무실은 절간보다 고요하였다.


"강팀장님, 모두 모였나요?"

"예, 모인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다 모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인가요?"

"죄송합니다. 모두 모였습니다."


강한솔은 양도광이 괜히 자신을 콕 집어 물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한솔이 보기에 양도광은 임지현 전 본부장의 발자취까지도 지워버리려는 듯했다. 그러니 그녀가 없는 지금, 강한솔은 끈 떨어진 갓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강한솔 스스로도 "이제 한없이 처량해지면 되겠구나" 하며 자조하였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일어난 후에야 의미를 가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강한솔은 일단 버티기로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양도광의 AI개발본부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떠난 임지현 이사를 기리는 일일지도 몰랐다.


"참…. 저희들끼리도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데 '블루웨일'이 튜링테스트는 어떻게 통과했는지 정말 신기하네요. 하하."


양도광은 환히 웃으며 끌끌거렸다. 팀장들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입꼬리를 당겼다. 쌉쌀한 풍경이다.


"우리 오션테크의 장점이 뭔지 아십니까?"


양도광은 한 명씩 눈길을 보내며 질문하였다.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열심히 한다는 거예요. 제가 그것만큼은 진심을 다해 인정합니다. 팀장님들 너무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게 본론이다.


"사용자 피드백은 보고 일하십니까?"


빔 프로젝트가 켜지며 블라인드에 PPT가 띄워졌다. PPT의 내용은 자체 개발한 AI, '블루웨일'에 대한 칭찬일색…. 이 아닌 혹평의 파노라마였다. 중간에는 육두문자로 범벅이 된 2000자 규모의 리뷰도 있었다. 20여 페이지가 지나고 PPT는 종료되었다.


"시장에서 '블루웨일'의 평가가 이러합니다. 관련하여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타박과 멸시였다.


"임지현 본부장님 때와 많이 다릅니다. AI사업본부가 지금 방향성을 잃었어요."


이사 임지현. 그녀는 한 달 전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AI 개발 사업의 책임자였다. 타 부서의 팀장들은 모두 강한솔을 흘끔 대었다. 차장이었던 그를 부장으로 끌어올린 게 임지현이었다. 그러니 강한솔은 명실공히 임지현 라인의 인사였던 것이다.


임지현이 AI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갔다면, 다음 이사는 강한솔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런 임지현이 사망한 이상, 강한솔의 거취는 불분명해졌다. 강한솔은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꼼지락대었다. 그러다 주먹을 쥐곤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본부장님. 전 본부장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심이 선 듯 강한솔의 목젖이 꿀렁대었다. 그의 울컥거림에 다른 팀장들은 큰 눈을 떴다.


"부서별로 성과가 미진하여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하여서는 추후에 성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이용자들의 불편사항에 대해서는 실무진인 저희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자료를 제시하신 건 사업의 방향성을 조정하는 게 아닌 실무진들의 사기를 꺾는 처사이십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게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강 부장님. 아직 많이 모르시나 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이 방에서는 오직 성과로만 이야기합니다. 그 외의 것은 중요치 않아요. 우리가 위로, 격려나 받자고 입사했습니까?"

"그러면 말씀해 주십시오. 본부장님께서 취임하신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사업 전략에 대해 여태 들은 것이 없습니다. 고견을 내려주신다면 저희가 그에 맞춰 최선의 성과를 보이겠습니다."


사실 강한솔 부장이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입 밖에 내뱉으려다 차마 하지 못한,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화와 같은 성토.


당신은 이 사업이 좌초되길 원하고 있잖아!


"엊그제 파쇄기 앞에서 마케팅부의 한 사원을 만났어요. 무엇을 파쇄 중인지 물으니 회의록이라고 하더군요. 슬쩍 보니까, 썩 괜찮은 아이디어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들을 통해 전달받은 것들은 음, 너무 반듯하게 정돈되었어요. 저는 좀 더 날 것의, 살아있는 감각을 원합니다."


강한솔을 비롯한 부서별 팀장들은 양도광에게서 불손한 의도를 느꼈다. 그들은 양도광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 파자하듯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부서별로 직원 두 세 명 정도 차출해서 제 집무실로 보내주세요. 직급은 대리 밑으로요. 젊은 친구들이 경험은 부족할지언정 우리보다 사고는 유연할 테니까요. 제가 미처 보고받지 못한 참신한 생각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보다 상세한 논의는 그 후에 일정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팀장들은 소문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양도광은 AI개발본부의 셔터를 내리러 온 사람이라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무엇하러 이리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단 말인가?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사업을 백지화할 명분은 차고 넘쳤다.


뱀같은 새끼 같으니라고.


강한솔은 양도광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말이 좋아 신입사원들과의 대담이지, 실은 팀장들의 전문성에 기스를 내고 있었다. 드랍된 안건에 대하여 양도광 이사가 벨롭을 지시한다면 팀장의 권위가 훼손될 건 뻔한 수순이다. 는 기본적인 위계질서까지 흔들 수도 있는 결코 가볍지 않은 사안이다.


무엇보다 로우한 아이디어들이 빌드업되지 않은 이유는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 본부장이 아래 직원들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안 그래도 위기에 봉착한 AI사업본부는 사공이 많아 산에 가기도 전에 심해에 가라앉을 것이 분명했다.


약간의 잡도리 아닌 잡도리를 더 하고서야 양도광은 팀장들을 물렸다. 팀장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양도광의 마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의기투합하였다.


아랫것들 입단속을 철저히 합시다.


하지만 마케팅부의 팀장은 이를 귓등으로 듣고 흘러 넘겼다. 사실 마케팅부는 AI개발본부에 속해있지 않은 협력부서였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AI개발부서와 운명 공동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임지현 본부장 시절에는 잦은 회의로 인해 번거롭기만 하였다. 솔직히 마케팅부의 팀장은 AI개발사업 자체에 불만이 많았다.


오션테크는 애당초 제조업 회사가 아니었나? 잘하던 걸 해야지 해외 빅테크가 선점한 영역에서 어떻게 승부를 보겠다는 거야?다가 할 거면 전략팀을 따로 둬서 마케팅 업무를 겸하게 해야지 타 부서를 끌어다 쓸 건 뭐람.


부서로 돌아온 마케팅 팀장은 늘어진 파티션들을 내려다보며 양도광의 작은 간담회에 누구를 보내면 좋을지 고민했다. 사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당장 써먹을 데가 없는 수습직원, 김하은이 있었으니까.


강한솔 팀장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며 승진을 앞두고 있는 남유경 주임을 떠올렸다. 대리가 될 정도의 연차면 자리에 따라 할 말 못할 말 정도는 적당히 가릴 수 있을 터였다. 다른 부서에서도 결대로 갈 줄 아는 그냥저냥 한 위인들을 보낼 테니 사업기획팀에서도 구색을 맞춰주는 게 탈이 없을 듯했다.


그러나 그 결정은 완전한 오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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