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불륜(7) : 파격적 발칙함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by 봉봉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올라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너무 놀라진 마세요. 살아 있는 건 아니니까요. 모두 편히 앉으시죠."


양도광의 친절한 안내에도 불구하고 사원들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본부장에 관한 숭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으나 집무실 안에 박제된 고라니가 있으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원들은 방금 전에 다녀간 팀장들이 그랬던 것처럼, 앉아서도 계속 고라니를 흘끔 댔다.


"다들 저걸 궁금해하더군요."


양도광은 레이저 포인터로 고라니를 가리켰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에요. 한번 보세요. 보고 또 봐도 참 멍청하게 생기지 않았나요?"


고라니가 취향인 것과 고라니가 멍청하게 생긴 것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사원들은 본부장의 말에 긍정해야 할지 부정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누가 먼저 반응할지 눈치를 살피다가 겨우 용기 내어 "예.", "네." 하고 웅얼댈 뿐이었다. 그 와중에 남유경은 본부장이 자신에게 질문할까 봐 이미 정리된 서류철을 다시 정리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본부장님. 말씀하신 대로 계속 보니까 진짜 멍청하게 생긴 것 같아요."


차를 끓이던 양도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찻잔을 꺼내왔다. 그리고 홍차잎을 두 스쿱 털어 넣는다.


"한 잔 드시죠."


양도광은 김하은에게 차를 대접했다. 옆에 앉은 법무팀의 정사원은 자기도 차를 하사 받을 줄 알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양도광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정사원은 무안하였는지 원래 손이 찌뿌둥하여 그랬다는 양 손등만 주물럭댔다. 다른 사원들은 본부장의 특이함에 무언의 속삭임을 교환하였다.


이 분 캐릭터 확실하시네.


"저기, 부서랑 이름이 뭐죠?"

"인공지능 전략마케팅부 사원 김하은입니다."

"김 프로, 제가 왜 고라니를 좋아할까요?"

"모르겠습니다."


대답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남유경은 그제야 박대리의 당부가 떠올랐다. 바로 지금이 김 사원에게 '멈춤' 신호를 보낼 때였다. 하지만 어떻게? 일개 사원이 본부장의 질문을 끊어먹을 방도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가?


남유경은 다른 사원들에게 애타는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기대할 것도 없이 역시나였다. 하나 같이 오가는 시선 속에서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집무실 어딘가를 응시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유경은 일이 잘못되어 덤터기란 덤터기는 모두 자신이 뒤집어쓰진 않을까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김 프로, 제가 방금 전에 물었습니다."

"예, 말씀하신 대로 방금 전에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로 모르겠어서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때로는 생각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방법일 수 있습니다."

"본부장님, 병원에서도 환자가 증상을 말해야 처방이 나옵니다. 그러니 본부장님께서 이렇다 할 힌트조차 주지 않으시고 답을 맞히라고 하시면 저는 답을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음, 그렇게 어렵게 다가갈 질문은 아니었어요. 그저 떠오르는 대로, 느낌대로 지어냈어도 괜찮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말만 번지르르한 게 싫습니다. 저는 모든 순간에 진심을 담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질문에는 본부장님만의 답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김사원이 본부장님께 말대꾸를 하고 있나? 설마, 아니겠지. 본부장님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아 다행이야. 오히려…. 재밌어하시는 것 같아. 둘이 코드가 비슷한가? 특이하네. 그나저나 이 자리가 얼른 좀 끝났으면…. 김사원도 계속 대화거리를 만들어봤자 좋을 일은 없을 텐데.


남유경은 이 대화가 일으킬 파급력을 예상해 보았다. 하지만 이내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결국에 둘의 대화가 끝나기에 나름일 문제였기 때문이다. 남유경은 관심은 서서히 '김하은'이라는 사원 자체에게로 향했다.


하은 씨는 본부장님이 어렵지 않은가 봐. 소문도 그다지인 아득히 먼 상사인데. 어쩜 저리 재잘재잘 잘 떠들까? 말하는 것만 보면 그동안 이런 자리를 기다려 왔던 것 같아.


"우리 사업부에 이런 인재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제가 이렇게 정곡을 찔릴 줄이야. 하하하!"


본부장이 웃었다. 그러니 모두 웃는다. 남유경은 그중에서 제일 크게 웃었다. 김하은이 차를 한 입 홀짝였다.


"찻잎은 이거보다 적게 써도 되실 것 같아요. 전자저울로 양을 계량해서 드셔보세요."

"김 프로는 차를 잘 아시나 봅니다."

"아주 잘은 아니고, 맛있게 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김 프로에게 많이 배워야겠네요."

"언제 시간이 되면 또 찾아뵙겠습니다."


이어지는 만담 속에 남유경은 김하은에 대한 생각을 달리했다. 이 사람은…. 난 사람이다!


다른 사원들 또한 초조해하면서도 조금씩, 점점 더 이 상황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고라니가 박제된 집무실에 변화가 일어났다. 때아닌 잔물결이 밀려와 발가락 사이를 간질.


"우리 오션테크에서 직원을 잘 뽑았네요. 신입 사원에게 당연히 이 정도 패기는 있어야겠죠?"


패기라….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


남유경은 박대리에게 찍소리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조망하였다. 더없이 초라한 사회인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답을 안 주셨어요."

"김 프로는 아주 집요한 면이 있군요."

"마음이 쓰이면 어떻게든 알고 싶어 집니다."

"바로 그 자세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의지!"


양도광이 박수를 쳤다. 다른 사원들도 박수를 쳤다. 연차도, 직급도 가장 낮은 김하은이었지만 이 자리에서 만큼은 본부장 다음이었다.


"제가 고라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허구한 날 로드킬이나 당하고 농작물이나 훔쳐 먹으며 근근이 살아가지만 대한민국의 산과 들을 지배하는 건 바로 저 멍청한 친구라고요."


양도광은 레이저 포인터로 고라니의 송곳니를 가리켰다. 사원들의 시선이 포인터의 붉은 점을 따라갔다. 남유경은 혓바닥으로 송곳니를 핥기 시작했다.


"저 송곳니로 곰, 호랑이, 표범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아니에요. 저건 자기들끼리 서열 싸움할 때나 쓰이지, 맹수들 앞에서는 힘도 못 써요. 그런데 그 잘난 곰, 호랑이, 표범들은 모두 어디로 갔죠? 곰은 케이지에 갇혀서 웅담이나 적출당하고 있고 호랑이는 동물원에서 고기 한 점에 재롱을 피우고 있습니다. 표범? 걔는 살아 있기나 한대요?"


양도광은 두 손을 사방팔방으로 휘저어가며 열변을 토했다. 아무렇게나 쏘아지는 레이저가 사원들의 동공을 스쳤으나 모두 태연히 눈을 깜빡일 뿐 감히 내색하지 못했다.


"잘 나가는 건 강한 놈이지만 지배하는 건 끝까지 살아남는 놈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매 순간을 기회로 여기고 브레이크 따위 밟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세요. 더럽고 치사해도 그냥 버티고 견디란 말이에요.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 지 잘났다고 뻗대던 놈은 시체가 되어 강물을 타고 내려올 겁니다. 욜로? 쉼의 미학? 돌아보는 삶? 그런 건 그냥 마지못해하는 구슬픈 '자기 위로'에 불과합니다. 제일 나쁜 놈이 공감하고 위로하는 선후배 동기라지요. 요즘은 그런 말이 없나요?"


사원들은 양도광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확실히 감을 잡았다. 그냥 미친놈이었다. 하지만 남유경은 조금 달랐다. 그는 본부장을 보며 "저 정도 광기는 있어야 이사를 다는구나" 하며 탄복했다. 그에게 본부장은, 말 그대로 미쳤는데 멋진 사람이었다.


"김 프로, 고마워요. 아주 훌륭한 아이스 브레이킹이었어요. 이렇게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니 벌써 가까워진 기분이 듭니다. 안 그래요, 남 프로? 이 중에서 연차가 가장 높은 것 같던데."


"예, 맞습니다. 저도 기쁩니다."

"대리 승진이 언제죠?"

"2주 뒤입니다."

"그래요. 다행이군요."


근처의 누군가가 콧바람을 내뿜었다. 남유경은 피부로 느끼고 귀로 들어 알았다. 눈알을 굴려 사원들을 하나씩 둘러보자 죄다 이사에게 집중하는 척하며 입가에 손을 얹었다. 남유경은 자존심이 상해 속이 쓰렸다. 그에게 높은 연차는 숙련도를 나타내는 지표가 아닌 자신이 얼마나 뒤처지는 인간인가를 나타내는 증거였다.


"요지는 이겁니다. 으흠!"


양 본부장은 목이 탔는지 적당히 따뜻할 정도로 식은 홍차를 마셨다. 환절기에 갈라진 목구멍이 촉촉이 적셔왔다.


"팀장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놓친 우리 사업부의 피와 살이 될 의견들이 있을는지 소중한 의견을 듣고 싶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건의하거나 말하고 싶은 게 있을까요?"


남유경은 입을 꾹 다물고 생각했다.


여기서 답을 한다? 그거야말로 "저는 사회화가 덜 되었어요!" 하며 설치는 꼴이지. 문제가 있어도 없다고 한 뒤에 요령껏 처리해야 해. 드러나지 않은 문제는 문제가 아니까.


다른 사원들은 멋쩍게 웃으며 그냥 넘어가자는 듯 재빨리 눈빛교환을 하였다. 하지만 그곳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오션테크의 미덕에 공감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남유경은 설마 하는 마음에 김하은을 보았다. 그녀가 손을 들고 있었다.


"저는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습니다. 엄청나게요."


이어서 김하은은 기다렸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4분 할로 접은 A4용지 한 장을 꺼냈다. 앞 뒤로 글이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남유경은 요즘 어떻냐는 주임 원사의 말에 선임들의 부조리에 죽고 싶다며 그 자리에서 소원수리를 적은 군 시절의 맞후임이 떠올랐다.


"김 사원. 그 부분은 따로 논의하기로 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내용 정리하여서 보고 드리는 건 어떨까요?"


영업팀의 성주임이 황급히 김사원을 제지했다. 눈가엔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지만 결코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이내 사원들은 놀라운 단결력을 발휘했다.


산불이다! 거기 당신, 뭐 하고 있어? 빨리 끄러 와야지!


소리없는 SOS가 빗발치며 너도 나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맞아요, 유관부서 회의 때 그렇게 얘기됐던 것 같아요."

"제가 실수로 회의록 노티 하는 걸 깜빡했어요. 미안해요. 김사원이 저 때문에 고생했네요."


하지만 김사원에게는 지조가 있었다.


"네? 그런 적이 있었나요?"


외통수. 체크메이트. 남유경은 양 본부장을 보았다. 그의 얇은 입술 사이로 혀가 살짝 드러났다.


아 끝났군.


양 본부장은 이미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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