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불륜(3) : 일탈의 연속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by 봉봉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버스 정류장에 내린 남유경은 연 금리 4.1% 40년 원금균등분할 상환의 에듀시티그린포레센트럴레이크뉴골드캐슬 3차 아파트로 향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9시 10분이다. 시내버스에 탑승했을 때가 오후 8시 5분쯤이니 편도로 거의 1시간이 되는 긴 퇴근길이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남유경은 한결같이 피곤하였다. 얼른 파자마를 입고 자버려야겠다는 생각뿐이다.


하지만 남유경은 졸음이 쏟아져도 숙면에 드는 것이 어려웠다. 만성적인 수면 장애에 약혼녀는 정신과 진료를 권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의 편견에는, 정신병원이란 뉴스에 나오는 흉악범들 혹은 일상생활이 불가능할만치 기행을 부리는 사람들만 가는 별난 곳으로 정의돼 있었기 때문이다. 남유경은 약혼녀가 병원 진료를 운운할 때마다 자신이 그런 이들과 동일선상에 놓인 듯해 심히 께름칙했다. 한 번은 욱하는 마음에 역정을 낼 뻔한 적도 있었다.


오늘은 잘 수 있을까? 몇 시간이나?


침실에 몸을 누인들 잠들지 못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선에서 발버둥칠까 봐 두려웠다. 그런 날엔 꿈자리도 뒤숭숭했다. 저번 주 목요일에는 꿈속에서 밧줄 타기를 하다가 줄이 꼬여 공중에 목이 메였다. 그렇게 솔방울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한참을 고통받다 겨우 눈을 떴을 땐, 몸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남유경은 걸음을 멈추고 귓불을 벅벅 긁었다.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길 때마다 시작되는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남유경은 잠에 드는 것이 두려워졌다. 이럴 때엔 긴히 복용할 수 있는 신비의 물약이 있다.


알코올 도수 4.5%의 캔맥주. 500ml까지는 필요 없다. 355ml 한 캔이면 숙면의 바다를 유영할 수 있다.


하지만 약혼녀는 예비신랑의 건강을 살뜰히 살폈다. 그러니 집에서 술을 마시는 건 언감생심이다. 올해 처가 쪽 친척들이 둘이나 암 진단을 받으면서부터는 냉장고의 맛술까지 사라져 버렸으니 협상의 여지조차 없음은 자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유경은 편의점 간판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구두굽은 약혼녀가 기다리는 103동 1805호와 편의점 입구 사이를 갈팡질팡하였다.


"어서 오세요."


결국 그는 작은 일탈을 감행하였다. 캔 맥주 하나를 계산하곤 그 자리에서 뚜껑을 따버렸다.


"손님, 실내에서 음주는 안 됩니다."


남유경은 멋쩍게 웃으며 "죄송합니다."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편의점 입구 앞에서 맥주를 목구멍에 쏟아붓다시피 했다. 식도를 따라 흐르는 아릴 듯이 차디찬 탄산감에 하루의 고단함 날아갔다. 이윽고 오늘은 숙면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에 몸이 나른해졌다. 그는 빈 캔을 찌그러트리고는 실실 웃으며 분리수거함에 던져 넣었다.


따각-뚜각-또각. 콘크리트 바닥에 닿는 그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그는 벌써 취한 것일까?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버리고 말았을 때의 배덕감 그리고 그것이 들킬 염려가 없을 때 느끼는 해방감이 빚어낸 쾌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가 한낮의 카페에서, 엘리베이터에서, 파티션에서 수습 직원에 대해 가진 생각에 비한다면 맥주 한 캔 따위야 아무래도 괜찮을 일이다.


현관문을 열었다. 환한 LED 조명 속에서 김하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치맛단 아래로 뻗은 희고 고운 곡선. 하지만 지금의 그에겐 그저 떠오른 생각일 쯤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함께 미래를 약속한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 왔어?"


중문을 열리며 약혼녀가 그에게 와락 안기었다. 그 또한 약혼녀를 끌어안았다. 약혼녀의 몸은 따뜻했고 귀 뒤에서 비누 향이 났다.


영락없이 다정한 부부의 모습이다. 둘은 아직 식을 치르지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지만 이 집에서만큼은 남편과 아내였다. 남편의 품에 안긴 아내는 가히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아직 지켜볼 일이다. 사실혼 관계를 혼인 관계로 보아도 될지는 해석하기에 나름이다.


"왜 이리 늦었어?"

"오늘 일이 많았어."


남편은 드레스룸에서 넥타이를 풀었다.


"회의가 길었나 봐?"

"좀 길었어. 페르소나 기획 때문에."

"그게 뭐야?"


아내는 남편이 대충 널어둔 옷가지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물었다.


"게임 캐릭터 만드는 것처럼 AI한테 인격을 부여하는 거야. 예를 들어 20대 후반의 예쁘고 착한 여성 같은?"

"그럼 나네?"


아내는 남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남편은 화답하며 입술을 맞대었다.


"밥은 먹고 왔다 했지?"

"응, 안 먹어도 돼."

"내일은 집에 와서 나랑 같이 먹어. 포괄임금제잖아. 남아서 일해봤자 누가 알아준다고. 칼퇴를 해야지."

"알았어. 그럴게."


남편은 아내와 뺨을 맞대었다. 밤공기에 식은 몸이 아내의 온기로 데워지고 있었다. 남편은 눈을 살며시 감고 상상했다. 이대로 결혼에 골인한다면 참 좋을 거야. 일이 년 후엔 아이를 낳아 번듯한 가정을 완성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흔하지만 이상적인, 작고도 큰 나의 세상….


"당신은 내가 그렇게 좋아?."

"응, 너무 좋아. 술 못 먹게 하는 것만 빼면."

"그건 앞으로도 안 될 거야. 손은 씻었어?"

"아니."

"빨리 샤워해."

"알았어."


남편은 화장실로 가서 양치를 한 후 손바닥 위에 샴푸액을 두 펌프 짰다. 이후 정수리부터 시작해 두피를 구석구석 안마하며 거품을 잔뜩 내었다. 도시의 미세먼지가 모두 씻겨 내려가도록, 섬세하게.


이어서 샤워기를 켜서는 찹찹 소리를 내며 몸을 헹구었다. 거품이 머리에서부터 씻겨 내려오는 동안 남편은 입을 꾹 다물고 숨을 참았다. 약염기성의 계면활성제에서 나는 떫은맛이 무척 싫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미끌거림이 다 사라졌다 싶을 때 남편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하-!"


그 순간 남유경은 카페에 있었다. 직원에게 커피를 받아 드는데 옆에 …. 가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는 ….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의 모습은 정말이지 완벽한 곡선을 따다 붙인 듯했다. 남유경은 …의 존재를 자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담스러웠다. ….의 얼굴에 모자이크를 씌웠지만 존재감은 감춰지지 않았다.


사원 김하은[마케팅부]


남유경은 강박적으로 그녀를 떨쳐냈다. 지금은 그저 떠오른 사람일 뿐이라며.


남편은 머리를 말린 뒤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각자의 직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빨래 바구니에 옷을 분류하는 방식에 대해, 냉장고 속 반찬을 먹어치울 순서에 대해, 결혼 준비 과정에 대해, 신혼여행지에 대해 베갯머리송사를 나누었다. 그러다 아내는 졸리다며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남편은 잠결에 뒤척이는 아내를 보았다. 그리고 아내가 깨지 않을 정도로만 굽 팔을 힘껏 조여 아내를 온전히 품에 두었다.


아내는 잠결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아내의 단잠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상상하고 있었다. 아내를 향한 스킨십도 사실은 그것을 달래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김하은.


남유경은 섹스가 하고 싶었다. 그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그래서 잠들지 못했다. 다행히 악몽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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