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불륜(10) : 남유경 대리(진)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 불륜.

by 봉봉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불륜.

어쩌면 박 대리가 30분만 늦게 지랄하였어도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유경은 여전히 혈기가 폭주하고 있었다. 온 몸의 열감이 채 식지 않은 그 순간이 박 대리로서는 하필이었던 셈이다. 그는 너무나도 일찍 남 주임에게 와버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두 손을 배꼽에 가지런히 모은 채 고분고분히 있을 부사수의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달랐다. 너무나도 달랐다. 그가 목도한 남유경은 격앙된 전사였다. 남유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 대리를 돌아보았다.


남유경은 삐쩍 마른데다 땅딸막한 사수의 모습이 역겨웠다. 저런 것에게 그동안 호되게 시달렸다는 사실이 모욕적이었다. 생각할수록 더욱 그랬다. 남유경은 박 대리를 반으로 접어 걷어 차버리고픈 충동을 간식히 억눌렀다.


"남 주임! 미쳤어요?"


파티션 속에서 잠자코 있던 사원들이 파리지옥 마냥 일제히 대가리를 쳐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박대리와 남주임을 가리켰다. 박 대리의 계획대로라면 그는 남 주임을 갈궈대며 폐급 부사수 때문에 고통받는 사수의 모습을 연출하면 되었다. 고로, 남 주임이 짓밟힌 종이 인형마냥 찌그러져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일이 펼쳐졌다. 남 주임이 달라진 것이다. 뚜걱-뚜걱- 다가와선 고작 반 걸음을 남겨두고 호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은 채 짝다리를 짚어선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정말이지 상대가 너무 한심해서 봐줄 수가 없다는 양 한숨을 푹푹 쉬더니 턱 밑 근육이 도드라질 만치 어금니를 앙다물며 온 몸으로 적대감을 표출했다. 절대로 박 대리가 알던 남 주임이 아니었다. 박 대리가 남 주임의 기세를 살피는 순간에도 남 주임의 일그러진 주름 밑으론 분노와 경멸이 뜨겁게 흘렀다.


"하아."


남 주임의 숨결에 박 대리가 움찔했다. 포식자가 피식자를 노리듯, 남 주임은 박 대리를 향해 더욱 나아갔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이제 반의 반 걸음도 안 된다.


"어지간히 하시죠? 저도 이제 대리인데."


"지금 장난칩니까? 사회 생활 처음 해봐요?"

남 주임은 아예 박 대리 곁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 군대 왔어? 기수라도 따지게? 근데 너 공익이잖아 새끼야. 군인 놀이 할 거면 논산에서 잘했어야지."


그것은 선전포고였다. 남유경으로서도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 했다. 녹음기를 켜서 폭언을 녹취한 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해도 박대리에게 충분한 모욕감을 선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듯, 그건 길고도 갑갑하며 번거로운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남유경이 느끼기에는 너무나 '하남자'스러운 해결방식이었다.


남유경은 밥 버러지 같은 박 대리는 물론이거니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월급 루팡인 주제에 주둥아리나 열심히 털어대는 다른 사원들도 꼴 보기 싫었다. 아니, 증오했다. 그런 개자식들에게 기어들어가는 모습 따윈 결코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당장에 죄다 찍어 눌러버리고픈 욕망이 강렬히 불타올라 그 자신조차 분에 못 이겼다.


"박 대리. 따로 얘기할까요? 피차 할 말도 많은데 굳이 여기서 할 필요는 없어보이는데."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박 대리라고요? 직급이 뭔지 몰라요?"


"내가 얘기했잖아, 나 이제 대리 단다고! 언제까지 직급 타령할거야! 고작 대리 따리에 환장했어? 내가 대우라도 해드려? 박, 대, 리, 님, 죄, 송, 합, 니, 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건데 추하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남유경은 그대로 라운지 건너편의 소회의실로 향했다. 박 대리는 당황스러움 반 두려움 반으로 부사수의 뒷 모습만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박 대리가 따라오지 않자 남유경은 뒤돌아섰다.


"안 따라오십니까! 얘기할 거면 따라오고, 짜질 거면 그대로 짜져서 일이나 하시든가!"


박 대리는 깨달았다. 쥐잡듯이 잡으면 쥐잡히듯 잡혔던 예전의 남 주임이 아니라는 것을. 전율하는 박 대리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였다. 그는 이미 남 주임의 콜로세움에 내던져졌다. 여기서 물러서면 부사수에게 먹힌 불쌍한 놈으로만 각인될 뿐이다. 싸우든 도망치든 가십거리가 되어 망신살을 뻗친 일이라면 차라리 결연히 맞서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박 대리는 검을 쥐고 방패를 들었다. 자신의 직급 하나만을 믿고서 말이다. 그동안 남 주임을 찍어눌렀던 경험이 없었다면 그는 결단코 남 주임에게 도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회의실의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남 주임은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양 거들먹대었다.


"이사실에서 무슨 허짓거리를 한 거예요? 제가 수습 관리하라고 안 했어요? 했잖아요! 그래서 알아 듣고 갔잖아요! 근데 데이터 팀의 안 주임이 말하는 거 들어보니 둘이서 아주 쌍으로 난리였다면서요? 사업부가 이러니, 직원들이 어쩌니, 업무가 어떻다느니. 하, 참! 기가 막혀서."

안 주임 그 새끼가 확성기였구나. 관상부터 쎄하더라니.

남유경은 누가 먼저 세 치 혀를 촐싹일까 했더니 역시나였다. 자신을 향해 눈깔을 치켜뜰 때부터 알아볼 일이었다.


"제발 생각이란 것 좀 하고 사세요. 내가 진짜 부탁할게. 팀장님도 안 하는 이야기를 왜 주임 따리가 가서 징징대요? 회사 생활 하기 싫어요? 사직서 내려고요? 나갈거면 조용히 나갈 것이지 고춧가루를 뿌려대긴 왜 뿌려대! 그렇게 지적질하는 남 주임께서는 맡은 업무는 잘하셨어요? 1인분도 못했던 주제에 징징대는 건 10인분이나 해쳐 드시면 어떡합니까!"


박 대리는 남유경이 화를 참지 못하여 길길이 날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 주임은 그런 생각의 궤적을 비껴나갔다. 반대로 대뜸 싱긋 웃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남유경의 눈에 박 대리는 발작하는 버릇 나쁜 아이쯤으로 보였을 지도 몰랐다.


"박 대리님. 혹시 안 주임한테서 제가 일을 아주 좆같이 했다는 소식은 못 들으셨어요?"


"뭐라고요?"

"내가 당신한테 넘긴 보고서 중에 직접 쓴 건 50%도 안 돼요. 대충 AI한테 외주줘서 택갈이한 거라고. 삽화도 나노 바나나에 프롬프트 돌려막기 해서 주제랑 일도 상관 없는 것들이 천지 삐까리였는데, 어째 하나도 못 알아보셨더라? 우리 박 대리님도 어지간히 일하기 싫으셨나보다. 어떻게 한 번도 못 알아볼 수가 있지? 이건 근무 태만으로 징계받을 건인데."


박 대리는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박 대리가 제출한 보고서를 복기했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슥 훑어보곤 대강의 만듦새만 확인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박 대리는 역량이 미천하였기에 피드백을 하려야 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근근히 회사생활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남 주임의 역할이 컸다. 곤란한 일이다 생겼다 싶으면, 남 주임을 닦달해 얻은 결과물에 글 간격만 조절하여 제 것처럼 제출하면 만사가 순조로웠다. 하지만 두고 쓰며 갈궈댔던 남 주임에게 자아가 생겨버렸다.


"야, 네가 생각해도 사수가 너 같으면 밑에서 일해주고 싶겠냐? 나니까 버텼지 너였으면 찔찔대다가 감사실 문지방이나 넘나들었을 거다. 그리고 너도 눈이 있고 귀가 달렸으면 상황 파악이라는 것 좀 해 봐. 이 사업부, 제정신이 아니야. 단체로 돌아버렸다고. 배에 구멍이 뚫리면 바닥에 못을 대고선 허공에다 망치질할 인간들로 무슨 AI를 개발하겠다고…."


남유경은 잠시 숨을 골랐다. 박 대리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팀워크니 협업이니 하는 것도 크루들이 1인분은 해줘야 할 수 있는 거예요. 근데 여기는 씨팔…. 0.5인분이나 할까 말까한 사람들만 있는데 대체 뭘 할 수 있겠어요? 나도 일을 좆같이 할 만하니까 좆같이 한 거야 이 개새끼야!"


"뭐? 개새끼?"

박 대리는 남 주임의 멱살을 쥐었다. 하지만 키가 머리 통하나 크기 만큼 차이가 나서 되려 남 주임에게 매달려 애걸복걸하는 꼴이 되었다. 그 모습이 가소러워 남 주임은 가슴 속에 묶어 둔 화마의 마지막 목줄을 풀어버렸다.

"그래, 이 좆만한 씨발 새끼야!"


그러곤 박 대리의 손목을 틀어쥐어 뿌리쳤다. 박 대리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남 주임은 양 손을 허리춤에 얹고 지긋지긋했던 그의 사수에게 훈시했다.


"사업기획부는 그냥 병신이 맞아…. 스스로 불구가 되기로 한 답도 없는 집단이라고. 과장이랑 차장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고 팀장님 혼자서 열심히 동분서주하시는데, 성과는 없고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알 수가 없다니까. 이런 무능한 집단에 속한 나도 등신이지만서도 이거 하나만큼은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거든?"


남 주임이 방긋 웃었다. 박 대리는 떨었다.


"여기서 네가 제일 폐급이야. 알았니? 우리 박, 제, 일 대리님아?"


이윽고 가가대소. 남유경은 한바탕 낄낄대었다. 마치 양도광 이사가 그에게 빙의하기라도 한 듯이.

"나 조만간 이사 발표회에 나가거든? 존나게 잘해서 꼭 너보다 먼저 승진해줄게. 그때 내 밑에서 개처럼 짖고 지렁이처럼 기어 봐. 내가 아주 잘근잘근 밟아줄 테니까."


남유경은 그대로 소회의실을 떠났다. 그리고 문을 닫기 직전, 박 대리가 '롤'이라는 게임에 환장한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타고 남은 잿가루를 박 대리에게 털어내었다.


"이 반토막난 피들 스틱 같은 새끼야. 나 연차낼 거니까 찾지 마라."


남유경은 더 이상 남 주임이 아니었다. 남 대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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