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 불륜.
박 대리와의 담판을 치른 남유경은 퇴근 버스에 몸을 실었다. 좌석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니 요동치던 맥박이 정상 속도로 돌아오나 싶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작고 빠르게 뛰기 시작해서는 호흡이 가빠졌다. 남유경은 모든 것이 위협적으로 보였다. 뜬금 없이 버스 안이 괴수의 뱃속처럼 변하더니 자신이 통째로 소화되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화물차가 버스가 옆을 추월할 때는 음료수 캔처럼 찌그러져 온 몸이 조각나는 상상까지 해버렸다.
숨통이라도 트이면 나아질까, 남유경은 넥타이를 풀고 카라의 단추를 열었다. 허억-헉.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스마트폰이 한 차례 진동했다. 남유경은 스크린을 두 번 터치하여 알림을 확인했다. 그가 속한 사업기획부의 강한솔 팀장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남유경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메시지를 열었다.
[남 프로님. 소식 들었습니다. 연차 상신은 결재되었습니다. 걱정 말고 일주일 동안 푹 쉬고 오십시오. 답장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유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의 고동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세상은 그가 알던 그대로였다. 버스는 버스일 뿐이며 사고가 발생해 사망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그러니 집 근처의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비스듬히 몸을 누이면 그만이었다.
남유경은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라벨의 '물의 유희' 재생했다. 귓가에 내린 총총한 물방울이 경직된 심신을 달래었다. 그렇게 경계가 풀며 주욱 늘어지니 어디선가 검은 덩어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연이어 드뷔쉬의 '달빛'이 떠올랐다. 검은 덩어리가 하늘로 솟아 넘실대는 보름달을 크게 베어물었다. 그러자 빛덩이가 폭발하듯 팽창하여선 심부를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그곳은 빛살조차 닿지 못한 깊은 수렁이었다. 남유경은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곤 맥없이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무턱대고 저질러버린 객기에 대하여 뼈에 새길만치 통절하였다. 한껏 널브러진 그는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후회하고 있음을, 그래서 두려움에 떨고 있음을.
사무실에서의 포효는 평상 시의 그로서는 결코 저지르지 못할 만행이었다. 회까닥한 자신이 원망스러워 미칠 지경이었으나 어찌 수습이 될 일도 아니었다. 그의 행보는 잊히거나 감춰지기에는 선이 지나치게 굵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들 정말로 돌이킬 수가 없다.
간담회 중에도 강을 건너버렸다고 생각했건만, 사실 그때도 돌아갈 쪽배 한 척 정도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생성형 AI들에게 질의한들 똑같이 답할 것이다.
[너는, 너무 크게 저질러버렸어.]
무엇이 그를 괴물로, 아니 그에게 잠재된 괴물을 일깨웠을까. 남유경은 통한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다가도 공기의 감촉이 말랑말랑한 것을 느꼈다.
숨을 마쉬고 내쉬면 코 끝에 복숭아 향이 감돌았다. 너울진 산들바람에게 불어온 곳을 물으니, 가리킨 곳에는 마성의 여인이 서있었다. 그녀가 그를 매료시켰고 그로 하여금 제 발로 지옥의 문턱을 넘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는 고통속에서도 그녀의 마력에 도취되어 그녀를 이루는 모든 것들에 마음을 기울였다. 이내 정신이 노곤해지더니 시간마저도 나른하게 흘러갔다.
집에 도착한 남유경은 곧바로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을 맞으며 배에 난 수술흉터를 만지니, 작년에 담낭제거수술을 받은 게 떠올랐다.
수술 전날 밤, 그는 장기가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에 잠에 들지 못했다.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누르자 그에게 진통제가 처방됐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두 번째에는 투여량을 늘렸다. 그럼에도 차도는 없었다.
세 번째가 돼서야 간호사는 그에게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을 투여했다. 일 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까, 남유경은 뱃속의 결석이 빠져나가기라도 한듯 통증이 말끔히 사라진 것을 느꼈다. 그리곤 아득해져 가는 정신줄을 살포시 놓으며 수면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오전 7시에 집도된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샤워를 끝낸 그는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은 뒤 로션을 발랐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자괴감에 아우성치는 소리 없는 사내를 마주보았다. 그의 안광은 퇴색하여 빛을 잃었다. 피부는 수척하고 창백하였다. 물 먹은 머리카락까지 아래로 축 처져 있으니 방금 건져 올린 익사체를 보는 듯하였다.
내가 죽지 못해 사는구나.
그는 드라이기를 켜서 머리카락을 말렸다. 식은 몸에 온기가 퍼졌다. 그런데 드문드문 뜨겁게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오래 지져볼까?
남유경은 귀 가까이 드라이기를 갖다 대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악' 소리를 내곤 드라이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고흐처럼 자신의 귀를 움켜쥐며 신음했다. 그 고통은 살점이 칼에 도려질 때와 같은 작열감이었다.
그는 수전을 냉수방향으로 끝까지 돌린 뒤 방금 전 귀를 지졌을 때와 똑같은 충동으로 기껏 말린 몸을 차갑게 적셨다. 서리가 낄듯한 한기에 뼈마디가 아렸다. 하지만 그는 달달 떨면서도 멈추지 않고 물줄기를 온 몸으로 맞았다. 이 고통이 있어야지만 지끈지끈한 번뇌와 회한이 강제로 종료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왜 그랬지, 왜 그랬지, 진짜 왜 그랬지. 이 미친 놈. 넌 그래서는 안 됐어. 나도 너를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어.
화장실 바닥에서는 드라이가 "위이- 잉" 하고 울부짖었다. 이내 그의 시야에 노이즈가 번졌다. 그는 세면대를 짚으며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띠리-릭
현관문이 열렸다. 퇴근한 그의 아내가 귀가했다.
"여보, 오늘은 일찍 왔네?"
그는 샤워 가운으로 허리를 두르고 아내를 맞이했다.
"뭐야, 샤워했어?"
"응."
반라의 남편을 마주한 아내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났다. 보조개를 머금은 채 가디건을 벗은 그녀는 셔츠의 윗단추를 풀어 헤쳤다. 곧장 다가가 남편의 목을 끌어안았고 가슴께를 맞대며 살랑살랑 몸을 흔들었다.
"할까?"
아내는 아름다웠다. 6년 전,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발랄함은 여태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때마침 그에겐 펜타닐 같은 것이 필요했다. 번민한 잡념의 고리를 끊어낼 유일한 방법으로서 말이다.
그는 아내를 욕망하였다. 그리곤 침실로 데려 가 가슴에 인 풍랑을 마음껏 희석하였다. 아내 또한 그를 향한 육신의 갈망을 불사질렀다. 둘의 입술에서 뜨거운 정념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사랑의 춤사위는 그에게 있어 해소의 과정에 더 가까웠다. 그는 애정이나 쾌락보다도 마음이 진정된 것이 훨씬 만족스러웠다. 이는 아내조차 모를 그의 마음 속, 그의 말로서만 알 수 있을 미지의 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