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향 Jun 11. 2023

나의 약점을 알아채는 데 필요한 시간, 1초

두렵고 피하고 싶은 감정을 마주하는 이유

짧다면 짧은 4년 간의 일을 끝내고 6개월을 쉬며 캐나다에 올 준비를 하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왔다. 쉬는 동안에는 실수랄 것도 딱히 없었고 애초에 실수를 할 일이 없었다. 4년 동안 일하면서 초반에는 이런저런 실수가 있었지만, 그 고통의 기간이 길지는 않았다고 기억한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것도 매번 똑같은 일의 반복이라 점점 익숙해지고 시야도 넓어지기 때문이다.


캐나다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하다 보니 나에게 인정욕구가 이렇게 강하게 있었나 새삼 놀랍다. 어설픈 모습을 보이기 싫고, 완벽했으면 좋겠고, 티끌 하나 약점 보이기 싫고, 자존심도 강해서 저평가당하는 일도 싫었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와서 뜻대로 될 리가 없지. 바뀐 버스 정류장을 찾지 못해서 한 시간 동안 이리저리 헤매기도 하고, 집에서는 산지 며칠 되지 않은 그릇을 깨 먹고, 한식당에서 파트타임 알바를 할 때엔 전화 문의에 틀린 답변을 하기도 했다. 조금만 침착했으면 그런 실수가 적었을까. 아무튼 시작을 이렇게 잡았지만, 오늘은 나의 ‘실수’에 대한 글이 아니다. 실수를 만들고서 나타나는 이후의 과정을 두려워하는 나의 모습, 나의 약점을 숨기고 싶어 하는 모습에 관한 글을 써보려고 한다.


나는 처음 알바를 시작할 때부터 일을 금방 배우는 사람이었다. 식당, 카페, 레스토랑, 어린이집, 어디서 일하든 이전에 이 일을 해봤냐는 소리를 듣고 금방 트레이닝 독립을 해서 너끈하게 일을 처리했다. 취업을 하고서도 초반의 자잘한 실수를 제외하고는 별일 없이 그저 평이하게 일을 수행했다. 이게 장점으로만 작용했으면 참 좋으련만, 인정 욕구가 높은 나에게는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듣는 직장에서 예쁨 받는 나’의 모습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실수를 하면 신뢰를 잃을 것이고 이제껏 쌓아온 나의 모습이 저평가될 것이다(또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라는 사고 회로를 갖고 있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머릿속 어느 뿌리에 꼽혀있던 자격지심에서인지 무시당하는 일이 싫었다. 자연스럽게 실수나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강박이 올라왔다. 오죽하면, 실수를 해버렸을 경우엔 그런 일이 벌어졌던 이유를 그럴듯하게 포장해 둬서 내 탓을 하지 못하게끔 미리 배경을 꾸려두기도 했다. 실수의 이유와 배경을 파악해 두고 사죄와 자책하는 모습, 그리고 다시 안 그러겠다며 신경 쓰는 모습으로 내 실수로 인해 깎인 신뢰를 다시 쌓곤 했다. 이것이 비정상이냐 물으면 비정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건강한 대응은 아니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의 초점은 문제 해결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이미지, 신뢰 복구에만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 보면 글을 더 탄탄하게 쓰기 위해 나의 행동을 되짚어 보기도 하고 이유를 파해쳐 보기도 한다. 갑자기 칭찬에도 방법이 있다던 오은영 박사의 말이 떠오른다. 아이의 자존감이 형성되는 시기에는 올바른 칭찬 방법마저 중요한데, 그중에서도 결과 대신 과정을 강조하라는 말을 강조한 적이 있다. “그림을 잘 그렸네. “ ”시험 점수를 잘 받았네. “라는 식으로 결과 중심의 칭찬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성패를 성취물로만 따지는 그릇된 오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일까 궁금해진다.



(좌) 봉사자의 날이라고 병원에서 준 쿠키, (우) 기프트샵에서 살 수 있는 오너먼트


워킹+홀리데이를 왔지만, 하고 싶은 것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일을 하지 않고 모아 온 돈을 쓰겠다 결정했고 이제 귀국일까지 백여 일이 남았다. ‘나 스스로 꾸려가는 유학이다’라며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는 시기를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을 하지 않기로 했지만, 기본적으로 해외의 삶에 깊이 뛰어들려면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거기서 단순한 장기 여행자와의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나는 병원의 기프트 샵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작은 가게라 혼자서 일하는 형태다. 과자, 젤리, 초콜릿 등의 간식과 캔 음료수는 가장 편하게 팔리는 것들이다. 직원과 환자들이 병원에서 자주 쓸 법한 일상생활 용품도 많이 있다. 이외에는 병원에서 왜 이런 것을 파는지 궁금증을 갖게 했던, 가방, 지갑, 접시, 주얼리, 일상 옷, 화려한 원피스 등등 다양한 물품이 많다.


이곳에 소속되어 몇 달이 지나다 보니 전부 역할이 있었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중앙 로비 옆에 위치한 이곳은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환자와 가족이 잠시 들려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오래 병원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가족에게 줄만한 소소한 오너먼트 사기도 한다. 아이가 태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온 지인이 급하게 인형을 사거나 반대로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이 병문안을 위해 컬러링 북과 색연필을 사간다. 병동에서는 매일 같은 소음(배드 끄는 소리, 바이탈 확인하는 소리, 약 먹는 소리, 띠띠 거리는 기계음)이 들릴 테지만, 1층에 위치한 이 가게에 잠시 들려서는 매주 새로 걸리는 옷을 구경하고 음악을 들으며 소소한 수다를 떨 수도 있다.


판매되는 수익은 전부 병원이 운영하는 기부금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콜라나 과자 같은 소소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싸게 살 수 있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가끔 사람들은 몇몇 비싼 가격의 물건을 보고 흠칫 놀라고 되돌아 나가기도 한다. 물건은 안 사고 시간을 때우는 것이 멋쩍은 손님들이 자신은 그냥 구경만 할 거라고 굳이 강조를 할 때면, 나는 “있고 싶은 만큼 편하게 시간 보내다 가세요. 이곳의 직원들은 모두 자원봉사로 있는 거라 판매 실적을 높여야 할 책임이 없답니다.”라며 부담을 덜어준다. 물론 이런 관심조차도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밖으로 나가버리지만, 주로는 소소하게 스몰톡을 즐긴다.(일단 나의 영어로는 소소한 것 이상의 주제는 무리이기도 하다.)


나와 (적당히) 소소한 주제인 ‘캐나다 산불’과 관련해서 대화를 나눈 손님과도 평이한 안부 인사로 시작했다.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본인들은 어느 지역에서 왔고, 이곳이 현재 화재 지역과 3시간 거리에 있지 않은지, 비는 왔는지, 등등 그렇게 화재와 관련된 얘기를 하다가 기프트샵에 관한 얘기로 넘어왔다. 가격대가 있는 물건도 있으니 들리는 손님들이 정말로 가방과 옷을 사가는지 궁금한 듯 보였다. 내가 기부샵의 뜻을 헤치지 않고 잘 대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표현선에서 만족스럽게 대답을 한 것 같다. 그렇게 둘러보다가 이 손님도 가방을 하나 골랐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는데, 해당 가방에는 평소와 사용하던 것과는 약간 다른 형태의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나는 그걸 숫자 1이 뒤집어졌다 생각을 했고, 170.99라고 불렀는데, 손님은 이 정도의 가방에는 너무 과한 가격이라고 했다. 다행히도 손님이 크게 재촉하질 않아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가격을 재확인할 수 있었고, 내가 1이라고 생각했던 게 간략한 버전의 달러 심볼이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잘 이해해 준 손님 덕분에 이 일은 하나의 이벤트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내가 이미 몇 주 전에 같은 가격표의 가방을 하나 팔았다는 것이었다.


(좌) 문제의 가격표, (우) 해당 가방 이외에 사용된 원래 가격표 형태


손님한테, 그것도 기부샵을 방문해 준 손님에게 사기나 다름없는 일을 벌였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심했고, 두 시간 정도 풀 죽어서 일을 했다. 캐나다 달러는 대략 공 세 개를 덧붙이면 한화와 비슷하기 때문에 약 10만 원을 더 내게 한 것이었다. 처음에 든 생각은 ‘와, 이걸 말해야 하나’였고, 곧이어 들었던 생각은 걱정이었다. 만약 매니저에게 털어놓는데 ‘일을 벌였고 어차피 바로 해결할 방법도 없는데 왜 알려서 귀찮게 문제를 붉히지?’라는 생각을 하면 어쩌나 싶었다. 말을 하면 해결해야 하고 말하지 않으면 문제가 아닌, 그 애매한 상황에서 혼자만의 갈등을 지속했다. 내가 고백을 한 후에 어떤 해결 방식을 제시할지 모른다는 그 불확실성에 지레 겁을 먹고는 그냥 모른 척할까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결국 혼자 고민하기보다는 내 다음 시간에 올, 현명하고 긍정 에너지가 넘치는 봉사자, M에게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한국에서 이제껏 겪었던 문제 해결 방식을 상상해 보자면, 일단 훈계를 들었을 것 같고(애매한 것은 상급자에게 물어보고 했어야지 왜 마음대로 진행했는지), 결제 내역을 모아두는 영수증함을 뒤져서 해당 영수증을 찾아낸 후, 카드번호로 카드사에 문의를 넣어서 당사자에게 연락이 닿을 방법이 있는지 확인한 후에, 만약 연락할 길이 없다면 일련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를 포함한 상황 설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팀원들에게 한 달 정도는 인계를 돌렸을 것 같다. 물론 상상뿐이긴 하지만, 꽤 현실성 있지 않나. 또 마냥 잘못된 방법도 아닌 게, 나름 가능한 해결 방안이다. 하지만 그 처리하는 과정이 그저 막막할 뿐이지. ‘노력했다’라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근무 후에 영수증을 뒤지고 카드사에 전화를 하는 그 과정이 마냥 나의 상상뿐인 것 같지는 않다. 언제부터인지 경중을 막론하고 실수를 하면 그 후의 처치에 대해 두려워하는 습관이 들어버린 것 같다. 그냥 그대로 얼어버린다.

 

“I need to confess.”


M은 내가 근무 시간이 끝나고도 가지 않고 자잘한 일을 도와주고 있으니 왜 안 가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사실은 내가 말해야 할 게 있어요”이러면서 운을 띄웠다. 이분은 이 와중에 나에게 “어머, 근데 방금 그 단어 되게 잘 사용했어 ‘라며 칭찬해 주셨다 (내가 어학원도 등록하고 가끔 영어 질문도 해서 영어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아는 분이라 이렇게 칭찬도 자주 해주시곤 한다). M은 고백할 게 있다는 나의 표현에도 무거워지는 분위기 없이 내가 하려는 말에 경청을 해주었고, 상황을 다 듣고서는 ’못 알아볼 만했다 ‘며 공감을 먼저 해주었다. 그리고 비싸게 사간 손님은 가격을 인지했는지, 아무 질문 없이 사간 건지 등등의 세부적인 상황을 더 확인하고, 비싸게 사간 손님에게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결론적으로는, 해당 손님에겐 안타깝지만,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나중에 가격이 이상하다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매니저가 해결해 줄 것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무리로는, 원래 사용하던 가격표는 숫자 앞에 공백처리가 되어 있어야 맞는 건데 두세 개의 가격표에만 해당 표시가 들어가 있으니 본인이 바꿔두겠다 했다. 계속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 해주니 오히려 실수한 내가 민망해져서 그 심볼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나뿐일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M은 한사코 나만 모르는 게 아닐 것이라며, 바꿔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정리하자면, M은 실수한 게 있다며 고백하는 나를 분위기로 짓누르지도 않았고, 필요한 상황 파악은 꼼꼼히 했으며, 현재 해결할 방안이 없으니 원인이 되었던 이상한(나에게만 이상한) 달러 심볼을 지운 가격표를 붙이겠다는 마무리를 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 미리 확인했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탓하는 뉘앙스의 대응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캐네디언이니 해당 심볼에 대해서는 분명 나만 몰랐을 테고, 내가 이번 실수를 통해 배우면서 알게 됐으니 가격표를 교체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일부러 내가 너무 스스로 탓을 하지 않게끔 ‘헷갈릴 만한 가격표이니 바꿔둬야겠다’며 말해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료도 이해해 주는 것을 나는 나를 바보 같다고 자책하며 몰아붙이고만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매거진에 글을 쓴 것이 3월 초다. 캐나다에서 넓은 세상을 보고 많이 적어두며 인생 공부를 하겠다고 기세 좋게 브런치를 시작해서는, 이 매거진에 겨우 글 4개 올리고 뜸한 채로 다른 매거진에 영어 관련 글만을 올렸다. 단순히 영어가 재밌어졌다는 이유에서가 아닌, ‘딴짓하는 인생 공부’에 4개의 글을 쓰며 이제는 나의 약점을 끄집어내고 마음을 넓히는 순서가 왔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나는 사람 단단한 것 마냥, 옹골찬 것 마냥 보이게 만들어 놨지만, 실상은 게으르고 고집 있고 자존심도 강하며, 비뚤어진 내면 아이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약한 사람일 뿐이다. 약점이 보이지만 건들기 싫었고, 그에 대한 글을 쓰는 고통에서도 피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부대꼈던 모든 해로운 자극에서 멀어지고 무난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이제 나의 강점도 보이고, 마찬가지로 약점도 보이고,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도 보이고,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열망이 느껴진다.


약한 부분은 보이는데 건드리기가 무서워선 한쪽에 덮어뒀다. 이번에도 핑계를 만든다. 내면 아이나 스트레스에 관련된 뇌과학 책을 읽어보고 나의 하루와 연관 지어서 글을 적어볼까, 그러니 내 안에 정리되지 않은 채로 쌓인 감정은 그때 가서 하나씩 생각해 볼까. 마치 집에 러닝머신을 두고 자꾸 옷으로 덮어두는 것과 같은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운동을 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고 그래서 러닝머신을 장만했는데, 지금 들고 있는 옷가지를 정리해서 옷장에 넣기 싫다는 이유로 러닝 머신 위를 덮어버린다. 러닝 머신임을 잊을 정도로 정리 안 된 옷을 쌓다 보면 점점 쌓여가는 옷에도 관심이 줄어서 저게 옷더미인지 아님 그저 내 방에 있는 어떠한 뭉텅이 존재인지 흐리멍덩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툭하고 바닥에 옷이 떨어지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옷더미를 정리한다.


문득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도 이러한 경험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마음속에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이리저리 날뛰다가 뜬금없는 말로 튀어나오는 적이 있는가? 집에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도 “아, 집에 가고 싶다”라는 말을 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씻고 있는데 갑자기 “짜증나”라는 말이 나오는 경우 말이다. 나는 이것을 이름 붙여지지 못한 감정이 속에 얽혀 있다가 어떤 미약한 신호에 붙잡혀 그나마 결이 맞는 표현으로 튀어나왔다고 이해하고 있다. 실제로 ’ 집에 가고 싶다 ‘는 말은 내가 학생 때 많이 했던(튀어나왔던) 말이고, ’ 짜증 나 ‘는 성인이 되고서 많이 했던(튀어나왔던) 말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 ‘짜증 난다’는 표현을 금지했다고 한다. <대화의 희열>에서 밝혔던 이유는 ’ 짜증 난다 ‘는 말로 너무나 많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며, ‘짜증’이라는 표현은 완전히 다른 감정의 무늬를 단순하게 뭉뚱그리는 표현이라 우리의 감정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한국을 나와서 반년 동안 입에서 튀어나온 적 없던 ‘짜증나’가 최근 들어 근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씻다가, 폰을 보다가, 예능을 보다가, 자려고 누워있다가 뜬금없이 입에서 작게 읊조려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왜 짜증 나?‘


‘짜증 난다. 모르겠다. 초조한가. 마음에 안 찬다.’


‘내가 뭐가 초조하지?’


‘이제 한국에 돌아갈 날이 백여 일 밖에 안 남았다는 것이, 그리고 아직 이룬 게 없다는 것이 초조하다. 남들이 나를 보고 시간 낭비였다고 판단할까 봐 불안하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는 순간이 올까 봐 불안하다. 지금 내가 내 능력 밖의 것을 도전하느라 나의 현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지 않을까 의심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약간의 감정 구체화 과정을 시킨 이후에는 크게 할 일은 없다. 어차피 그에 대한 답은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부샵에서의 현명한 동료 M을 내 머릿속에 소환한다. 공감하고, 상태 파악을 한 후에, 조정할 수 있는 것만을 조정한다. 물론 재발 방지까지 곁들이면 좋겠다. 내가 초조했구나, 불안했구나. 공감을 하며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최근에 무기력하고 밤에 잠도 자기 싫었는지 다시 확인해 본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지쳐있기도 했나 보다며 재평가를 하고, 계획해 뒀던 오후 계획을 다시 점검한다. 해야 할 일은 줄이고, 하루 종일 듣던 미드나 팟캐스트도 오늘은 꺼둔다. 대신 이전에 영어로 녹음했던 파일을 들어본다. 어떻게 생각해도 내 영어는 늘었다. 단 한 달 전과 비교를 해도 늘었으니, 캐나다에 온 초반 파일과 비교해 보면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늘었다고 할 정도였다. SNS도 필요 없는 자극 투성이니까 꺼두고 메신저 연락도 줄인다. 낮에는 햇빛 쬐러 돌아다니고 수영도 가고 밤에는 일찍 자게끔 미리미리 잘 준비에 들어간다. 응급 강사 자격증도 정말 내가 해낼 수 없는 단계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아니다, 솔직히 할 수 있다. 괜한 핑계로 미루지만 않으면 충분한 퀄리티로 준비할 수 있다. 영어 대사를 평가받는 자리가 아닌, 내용 전달을 효과적으로 하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목적임을 기억해야 한다. 담당 강사에게 마지막 티칭 평가를 받는 단계도 진작 끝낼 수 있었을 것을 영어를 이유로 한 달을 더 미룬 상태이다. 게다가 그때 담당 강사는 나에게 굳이 영어 때문에 평가를 미룰 필요는 없지만, 일단 내가 미루기를 원하니 알겠다고 할 정도였다. 분명 미루고 있기 때문에 오는 스트레스도 있을 것이다. 이렇다면 차라리 평가 과정을 빨리 끝내는 것이 맞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괜한 걱정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피하자. 지쳐서 그런 것이다. 내 노력이 겉핥기가 아닌 진짜라면 내 지인 중에 내 노력을 폄하할 사람은 없다고 보고 믿어도 된다. 놓을 것은 빨리 놓고 잡을 것을 빨리 잡자. 그렇게 마구 잡이로 튀어나오는 감정을 정리하고 나니까 신경 쓰이던 ‘짜증 나’ 현상이 사라졌다.


실수를 하고 동료에게서 힐난을 받거나 저평가를 받을까 봐 미리 겁을 먹던 순간에도, 표현되지 못한 감정이 속에만 쌓여서 지쳐가는 순간에도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되돌아볼 1초였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꾸며낸 내가 되지 말고 나에게 떳떳하기 위한 단단한 나를 만들기 위해서, 아직 약하기에 계속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나에게 관심을 주고 붙잡아 두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도 나의 글이 누군가에겐 작은 숨구멍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잠시 게을렀던 ‘딴짓하는 인생 공부’ 다시 시작이다.




 



이전 05화 책상 앞에 붙여둔 엽서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