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해보고 얻어가는 ’아하! 모먼트‘
방금 전 코난 오브라이언의 영상을 하나 봤는데, 한참 머릿속에 남아있다. 나의 1년 동안의 생각과 완전히 일맥상통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보고 있을 젊은 청년들에게 간청합니다. 제발, 시니컬해지지 마세요. 저는 냉소적인 태도를 가장 싫어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제가 가장 싫어하는 성격인 데다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어요. 인생에서 자기가 가질 거로 생각한 것을 모두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정말 열심히 일하고,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한다면, 멋진 일들이 일어날 겁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사실이에요.”
나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가지고 캐나다에 왔지만, 몇 가지 경험을 통해 영어를 배우는 것이 너무나도 재밌어져서 일하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일을 한다고 영어 공부를 못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당시의 나는 영어를 배우고 써먹기를 일 년 안에 전부 하길 바랐고, 영어로 된 과정의 응급처치 강사 자격증을 따길 바랐으니,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그리고 일에서 오는 수입과 경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를 버렸으니, 어떻게 그 기회를 충당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처음에는 풀타임은 아니더라도 짧은 시간이라도 하는 일을 구할까 생각을 하다가, 강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영어를 공부하며 일주일에 최소 14시간의 전화 영어와 화상 영어 수업을 받는 상황에서는 영어에 집중해 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그러다가 자원봉사라도 해볼까 싶은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살아보고자 온 나라에서 일은 하지 않고 어학원도 안 다닌다고 하면, 충분히 그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 단순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자원봉사 활동은 나의 캐나다 생활에 큰 주축이 되어 주었다. 과연 이게 현실적인가 묻는다면 나는 “못 할 이유는 무엇이겠어?”라고 대답하고 싶다. 어차피 타인의 “대체 왜?”라는 시선에 흔들릴까 봐 나는 미리 기준을 정해두었다. 나의 이번 일 년은 버릴 것이다,라고. 낭비하기로 했으니 해보고 싶은 것 좀 해보는 것이 대수랴.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나는 이곳에서의 자원봉사 활동을 할 것을 고수했다.
병원에 활동 지원서를 넣기 위해, 세 건의 추천서가 필요했다. 심지어 해당 추천서는 나에게 공개되면 안 된다고 강조해서 나는 구경도 해보지 못했다. 내가 추천인의 이메일과 인적 정보를 받아 병원 측에 전달하면 병원에서 해당 추천인과 직접 추천서 양식을 주고받는 형식이었다. 나는 내가 이전에 일했던 병원의 교수님, 동료, 그리고 캐나다에서의 첫 번째 에어비앤비 호스트 앤 아줌마에게 부탁했다. 물론 나는 그들의 답변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한 달의 심사가 끝나고 면접을 한 시간 정도 했다. 주로 환자 정보 보안, 안전과 관련된 질문과 답변의 형태였다. 친구와 떠드는 대화가 아닌 나름 공적인 자리에서, 나의 답변을 위주로 채워진 한 시간은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예전 병원에서 일했을 때의 경험, 이곳 병원에서 지킬 약속, 미리 받은 온라인 수업에서 얻은 정보 등을 간결히 짜임새 있게 답하고 싶었다. 긴장감으로 인해 중간중간 떠는 목소리가 나와서 창피했지만, 면접자가 한 시간 내내 온화하게 웃는 표정으로 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보여주어 다행히도 끝까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래 봬도 ‘자원봉사를 하고 싶소’라고 하는 사람을 뽑는 거라 면접 자체는 그렇게 딱딱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에게는 영어로 또 다른 일을 두드려 열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벅찼다. 하게 될 것으로 생각지 않았던, 해외에서의 자원봉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내 한국 직업과의 약간의 연결 고리를 위해 병동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필 코로나-19로 인해 봉사 활동이 많이 축소되어 있었고, 병동 쪽은 약 한두 달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곳에서 자원봉사활동은 모집 공고상으로는 최소 6개월을 요구했지만, 실제로는 넉넉한 기간의 봉사자를 원하고 있었다. 다른 자원봉사자들은 주로 오랜 기간, 몇 년에서부터 15년까지도 해온 베테랑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화 간단히 면접 일자를 정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9월까지 해야 하 상황을 얘기하자 전화 너머로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자원봉사를 거절당했다. 나는 기간이 짧아서 안 되겠다며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잠시 몇 분간 쳐다봤다. 다시 전화를 걸겠냐 말겠느냐는 고민은 오래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고서 나는 지금 내게 해당 봉사활동이 가치 있는 이유를 얘기하고, 스케줄이 자유로우니 어떤 대체 근무라도 가능하다는 장점을 얘기했다. 덕분에 예외적으로 6개월이 안 되는 기간으로도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소중하고 짧은 기간이니 언제 자리가 날지 모를 병동 파트 빈자리를 기다리느니 지금 당장 사람이 부족한 기프트샵에서 근무하기로 했다.
이런 흐름에 병동 파트를 받지 못한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첫날, 트레이닝을 받는 날 이 생각은 변하게 된다. 작은 내용 하나하나 인수인계를 받으며 해외의 낯선 곳에서 한 명의 역할을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트레이닝이 끝나면 내가 혼자 기프트샵을 맡아야 했다. 모든 일이 나에게 달려있었다. 자잘한 질문도, 전화 문의도, 신경질을 부리는 손님도 내가 감당해야 했다. 근무 교대를 할 때 만나는 다른 봉사자들은 모두 타인에다가 이방인인 나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친절했다. 매번 나의 사소한 일상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귀를 열어 들어주었다. 처음에는 너무 어색했다. 내 가족과의 대화는 주로 본론만 꺼내고 더 세부적인 이야기까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론만 말하고 눈을 땡글 땡글 굴리고 있으면 기프트샵의 아줌마들은 질문을 더 이어서 내가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상대방이 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대화한다는 것은 어려웠지만, 가능했다.
해외에서 이유 없이 봉사 활동을 한다는 것은 의문을 안겨주기 좋은 활동이다. 보통은 은퇴자들이 노년의 즐거움으로 찾기 마련인 병원의 기프트샵에 웬 젊은애가 있으니 간혹 손님들이 물어보곤 했다.
“학생이니?”
아니라고 대답하는 순간 다른 질문이 이어진다. “그럼 일을 하고 있니?” 또 아니라고 하면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자꾸 내 개인적인 얘기를 꺼내게 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무례할 정도였다. 한 봉사자 아주머니는 나에게 “네가 친절한 것은 알지만, 그렇게 개인 얘기를 답해줄 필요는 없어.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아도 돼.”라고 얘기하곤 했다. 나는 속으로 ‘친절한 게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친절했다기보단 돌려 말할 정도의 영어 스킬이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그저 아이같이 친절한 존재였는지, 나를 마냥 물가에 내어둔 어린아이처럼 걱정했다.
아무래도 그들의 걱정에 공감이 가는 경우도 생기면서 나는 나의 기준을 세워 몇몇 손님과는 스몰톡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일부에겐 친절할 필요도 없고, 하나하나 안내해 줄 필요도 없고, 모든 질문에 대답해 줄 필요도 없다는 것을 배웠다.
어디에서든 좋은 사람이 훨씬 많다고 느낀다. 나는 나의 영어로도 그 좋은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한 번은 홀란드에서 왔다는 노년의 여성과 짧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에는 폴란드 인가 싶었지만, 나중에 검색해 보니 네덜란드가 첫 독립할 당시의 중심 도시였다고 한다. 그녀는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전에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고 했다. 기프트샵에서 판매하는 옷을 구경했고, 하늘색의 드레스를 골라서는 사도 될지, 입어봐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나는 그런 손님에게 “여기 기프트샵에서 일하는 모두는 자원 봉사자들이라 수익을 올려야 할 의무는 없어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입어 보시고 결정하세요.”라고 했다. 솔직히 옷을 팔기엔 불편한 시스템이다. 기프트샵에는 옷을 갈아입을 공간이 없지만, 긴 거울이 있고, 화장실에는 옷을 갈아입을 수가 있지만, 긴 거울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에게 허락을 구하거나 내가 권유해서 화장실에서 갈아입어 보고, 확인이 필요하면 입은 채로 가게에 다시 들려 거울을 보고 옷핏을 확인해 보곤 했다.
그녀는 손에 들었다 내려놨다 했던 하늘색의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가게에 와서 나와 같이 옷핏을 점검했다. 결론적으론 원피스 하단의 컷이 너무 넓게 퍼져서 부한 느낌이 드는 모양새라 결국 구매는 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 갈아입고 왔다 갔다 하느라 귀찮았을 테지만, 옷이 왜 이렇냐며 툴툴거리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저 눈을 마주치며 아쉽다고 웃었고, 그녀는 입어 보고 확인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서로 영어가 제2 외국어인 것을 알아챈 우리는 약간의 시간을 내어 수다를 떨며 경험을 나눴다. 대화의 시작은 나에게 늘 애매한 답변을 안기는 그 질문이었다.
내가 이곳 캐나다에서는 학생도 직장인도 아니지만, 그저 시간을 보내며 사람들을 만나고 일주일에 한 번 이곳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대답했더니, 그녀는 아프리카와 유럽 이곳저곳의 케어 센터를 돌아다니며 의료 관련 일을 했고 일부 시간은 본인 또한 병원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세계 여러 곳을 다녀봤다고 운을 떼며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에 일반적이고 단순한 표현 이상의 특별함이 있지 않냐는 질문을 했다. 분명히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경험을 넓힌다’라는 표현은 이제 진부할 정도로 흔한 문구이다. 이젠 지겹다. 어떤 다양한 사람? 어떤 경험? 분명 이런 딴지가 걸리거나 과소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상상이 들기도 한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는 다양함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해볼 수도 있다는 너른 경험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진상이라고만 생각했던 노인이 어느 화창한 날에는 날씨가 아름답다며 먼저 인사를 건넬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말하는 것인가? 이렇게 ‘다양함’에 정의를 내리는 순간, ‘다양한 사람’을 묘사하려던 목적을 저버리고, 살면서 한 번은 마주칠 수 있는 사람에 관한 묘사가 되어버린다. 입으로 꺼내고, 글로 쓰고 읽는 도중에 다양함이 퇴색되는 느낌이다.
마치 ‘지나가는 행인 1에게서 깨달음을 얻다’ 이 정도의 캐치프레이즈를 접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오늘의 글을 쓰는 것도 한참을 빙빙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날이 좋은 시간에 창문을 활짝 열면 따스한 햇빛이 비쳐요! “와 같은 글을 쓰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하고 이젠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따스한 햇빛이 비치던 바로 그 순간의 특별함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뭐? 따스한 햇빛을 인지하지 못하던 사람에게는 그와 같은 뻔한 글로도 햇빛을 상상하며 특별함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홀란드에서 온 노년의 손님은 ‘다양한 사람들’, ‘매일 접하는 새로운 이야기’, ‘넓어지는 경험’과 함께 이 얘기를 했다. 그 모든 순간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들과 나눈 뒤 밤마다 침대 옆 작은 전등을 켜고 그 이야기를 메모해 두는 순간이었다고 말이다. 하루를 되짚으면서 특별함을 발견했던 기억 한 부분을 잡아내어 글로써 적어두는 순간에 ‘자신이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특별한 하루의 순간을 지나치지 않고 잡아낼 수 있는 마음가짐 자체가 특별하게 여겨졌다.
그 뒤로, 나 또한 자원봉사 일기를 적었다. 어떤 손님이 있었는지, 어떤 일상이 있었는지, 어떤 즐거운 대화를 나눴는지, 사진을 찍듯 기억에 셔터를 누르고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 한 자, 한 자 적어나갔다. 쓰다 보니 나중에는 절대 기억할 수 없을만한 사소한 일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빠서, 또는 흔한 일이라 치부하여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금방 잊혔을 그런 순간도 많았다. 내가 기억하고자 일기장에 적어두고 보니 이제는 반짝반짝 새로워 보였다.
나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완벽한 계획을 따르고 있다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살면서 중요도에 따른 정답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데, 그냥 떨쳐내 버리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삶에 목표를 두지 못했던 나는 일 년의 시간을 낭비하고자 마음먹고 캐나다에 갔었다. 귀한 시간이었고, 다시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기회였다. 가서도 남들이 ”굳이? 왜 그걸? “이라 반응할 만할 것들을 많이 했다. 일을 하지는 않더라도 열심히 봉사 활동도 다니고, 반할 정도로 멋있는 강의를 보고 그 강사님을 따라 강사 자격증을 따기도 하고, 친구들과의 모든 사소한 시간을 소중히 했다.
만약 내가 캐나다 생활에 (목표는 있을지언정) 정답을 정해둔 상태였다면 나의 일 년은 그야말로 실패한 기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답이라는 틀에서 나를 빼내고 보니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얻은 성취감이 꽤 된다.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나라는 존재가 하나의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며 나의 발판이 더욱 안정되어 간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아 현재 진행형의 시제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멋진 일이 아닐까?
굳이 한바탕 해보는 거다. 그냥도 아니고 열심히 해보는 거다. 겁이 난다면 차라리 기간을 정해두고 해당 기간을 버릴 거라 마음먹어봐도 좋겠다. 그 경험 안에서 특별함을 마주하고, 마주한 특별함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반짝반짝 멋진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