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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향 Oct 21. 2023

나에게 오라

헤매던 나의 종착지는,

캐나다 생활의 마무리와 함께 일 년간 야금야금 써오던 글도 끝났다. 써보고 싶던 글을 다 썼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일단 흘러가는 감정을 붙잡아놓고 나와의 대화를 진지하게 할 수 있던 기회가 되었다.


내가 흘려보냈던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글을 썼다. 잊고 있던 취향에 관한 글을 썼다. 꽁꽁 숨기고 피하던 약점을 꺼내보는 글도 썼다. 보아달라고 소리치는 나의 감정을 읽어보는 글도 썼다. 나의 여행에 관한, 그리고 그 여행을 통한 나의 변화에 관한 글도 썼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나에 관한 글을 썼다. 일기와는 한 끗 차이인 그런 글이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에는 대학만 가면, 전공만 취업이 잘 되는 것으로 고르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대학생에 해야 할 일이 또 있었다. 직장을 갖고 일을 하며 점점 미션을 수행하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학도 졸업해 봤고, 취업도 해봤고, 조금이지만 돈도 모아봤고, 일을 하며 타인에게 인정도 받아봤다. 하나씩 “미션 통과” 도장을 모아 오듯 계단 하나씩 밟아갔다.


”이 정도 해봤으면 이제 충분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연애를 해도 재밌던 적이 없다. 나 하나의 미래가 안 그려지고 있는데 배우자를 만들어 사는 미래는 더더욱 상상조차 되질 않았고 흥미 또한 없었다. 내 삶의 중심에 내가 없었다. 결국 나는 길을 잃었다.


나는 끊임없이 가족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그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충동적으로 지출을 하거나, 운전 중에 길이 막히면 모르는 길로 가버리고, 뒷 일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버스를 탔다. 밤에 잠을 자기 싫어 억지로 버티게 되었고, 하릴없이 그 시간을 버렸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 항상 핑계를 만들어 내 세이프존을 만든 뒤에 사람을 대했다. 스트레스는 악순환으로 흐르고 결국엔 나를 좀먹는다. 표출될 곳이 없으니 계속해서 나에게 쌓여간다. 인간의 본능은 그런 위협에서 벗어나길 바라기 때문에, 점점 감정을 차단시키게 된다. 감정이 자극될 흥미를 잃는다.


[감정이 계속 쌓이다 표출할 곳을 찾지 못하면 결국 감정을 아예 차단시킨다. 즉 무감각해지는 것을 최선의 방법으로 택하게 된다. 책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 페이지 139]


모든 것을 무덤덤하게 흘려보내려 해도 상처는 상처,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다. ‘무감각하다’라고 표현하기보다는 ‘감정이 죽어간다’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 간극을 참을 수 없을 때는 팔을 때려 멍을 내기도 했다. 스트레스에 압박을 받으면 멍자국을 눌렀다. 아픔을 느낄 때 좀 더 정신이 뚜렷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책을 읽었다. 제목은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이다. ‘엄마만 부모냐?’라는 반응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작가의 책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를 참고해 보면 왜 유독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는 그토록 감정 대물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제목이 단순히 자극성을 띄기 위한 장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책의 여러 부분에 밑줄을 치며 나와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했다.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있었고, 저자의 확언에 마음이 쓰라린 경우도 있었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밑줄을 치고 치다 보니 페이지 전체에 줄이 처져 있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노력해도 부모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대목이었다. 스스로 자유를 주어야 하고, 사랑이 기반이더라도 독과 같은 관계가 될 수 있기에, 몇 달에서 1년, 필요하다면 그 이상 떨어져 지내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내용을 적혀있었다. 떨어져 시간을 보내고 나와 나의 내면 아이를 먼저 찾고 숨통을 틔운 후에 치유라는 것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책 <엄마에게 사랑이 아닌 상처를 받은 너에게>, 페이지 145)


나 또한 아예 멀리 캐나다로 가고자 마음을 먹고, 반년의 준비 후에 캐나다로 건너가 일 년을 지냈다. 시차라는 좋은 이유로 아침 6시에 일어나 뉴스를 봤고, 매일을 걸어 다녔고, 책을 읽었다. 자기 치유의 기본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는 책의 글귀에 나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기보단 정제되어 남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나의 이야기이다. 예전에 어떠했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지금은 어떠한가? 하나하나 안전한 공간에 약간의 조각은 숨긴 채로 서서히 나의 이야기를 해왔다.


정말 현실적이지 않다. 한국에서 착실하게 경력을 쌓고 있다가 갑자기 캐나다로 가선 일도 안 하고 사부작사부작 이것저것 건드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량이질 않나 싶어 걱정되었다.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날이 좋을 때 하늘이 푸른 것이 보였고, 집중해서 차근차근 순서대로 일처리를 할 수도 있게 되었고, 베풂의 온기를, 따듯한 말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버려두었던 감정 하나하나 주어 담아, 이 감정은 무엇인지, 이 분노는 무엇인지 내면 아이와의 대화가 가능해지니 ‘나의 모습’이 비로소 보인다.


미래가 안 보여 사는 목적을 못 찾겠다던 나는 ‘나의 모습’을 곧게 보고 나서야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여러 가능성을 펼쳐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간다. 기대감이 피어오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죽어 있지는 않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원인에 조언을 더해 결과를 얻어내는 간단한 순리는 아닐 것이다. 치유와 성장의 과정 속에 퇴행, 후퇴의 과정 또한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어떤 기분 속에 갇힌다고 하더라도 나는 한 번의 빛을 보았다. 날씨가 좋은 날 밖에 앉아 따듯한 햇볕에 몸을 덥히는 기분을 알고 있다. 목 뒤가 뻐근할 때,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뭉쳤던 목 근육이 사르르 풀리는 순간의 감각을 알고 있다. 처음 만났음에도 온기를 담아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마주한 기억이 남아있다. 앞으로는 그 기억이 나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문장으로, 언제가 되었든 내가 다시 길을 잃는 상황에 빠진다면,


‘나에게로 돌아오라 ‘라는 말을 기억하라고 남겨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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