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과 나의 사막>을 읽고,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는 중에 표지와 제목, 거기에 작가의 이름까지 특이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는 카페 장식장에 걸려있을 만큼 단조롭고, 표지에 선인장이 있길래 사막에 관한 내용이려나 생각하고 있으니 제목에 '사막'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내용일까? 의문이 들고 있는데 이번엔 작가의 이름이 눈에 띈다. 천선란 작가. 나와 한 살 차이 나는 사람인데 베스트셀러에 책이 올라있다니, 그리고 이미 작품이 한두 권이 아니라니, 셈이 나기 시작한다.
효율성을 따진답시고 논픽션 위주로 읽다 보니 순수 소설이 잘 읽히지 않았다. 되돌아가고, 다시 되돌아가고, 앞 장도 펼쳤다가, 내가 뭘 놓쳤나 싶어 몇 장을 다시 뒤적였다. 나는 웬만큼 복잡한 내용이 아니면 페이지를 그대로 머릿속에 찍는 듯 읽고, 중요한 부분이나 마음에 와닿는 부분은 다시 찬찬히 읽는 습관이 있었다. 언제부터 나를 담아내는 독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독서를 했는지. 어릴 때처럼, 책을 읽으며 다른 세상을 거닐기엔 내가 너무 바빴다고 핑계를 내어보지만, 썩 마음에 드는 핑곗거리는 아니다.
감정에는 효율을 따질 수 없다. 따져서는 안 된다.
책에게 딱 걸려버렸다. '효율성 그렇게 좋아하다가 감정 하나 읽지 못하는 멍청이 된다,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뭔 효율성을 따지냐, 정신 차려라!'라며 혼이 난 것 같았다. 나도 답했다. '아이고, 알았다. 책을 책답게 읽을 게.' 그때부턴 책의 감정을 읽었다. 책 속의 고고가 어디에 도착하는지 결론을 알아내는 것은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다. 도중에 이뤄진 모든 대화, 모든 손짓을 읽으며 내가 잊고 있던 독서 방식을 다시 떠올렸다. 1/3의 지점을 지날 때쯤부터는 원래의 속도를 어느 정도 찾아서 하염없이 빠져들어 읽었다. 다 읽는 데 2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사막의 모래에 천천히 잠식되듯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고가 되었고, 랑이 되었고, 지카가 되었다. 이래서 내가 독서를 좋아한다.
하이라이트를 치던 전자펜도 내려놨다. 나는 지금 시험 준비를 위한 글을 읽는 것이 아니다, 삶을 위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읽는 것도 아니고, 남들 보기 좋게 글 쓸 때 넣기 좋을 문장을 고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를 위한 삶을 살자고 캐나다에 온 지 4개월 차가 되었다. 당연히 4개월은 짧다. 게다가 돈도 안 벌고 겉치레로 더욱 밝은 척 '영어 공부하고 책을 읽으며 나에게 집중해 보겠다'라며 살아가니 그 4개월은 빛과 같은 속도로 지나갔다. 당연히 결과물도 없다. 있다고 볼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영어 시험 점수로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고 싶어서 모의고사를 봤는데 리스닝에서 가장 높은 등급대의 점수가 나왔다. 그리고 한 달의 기다림 끝에 자원봉사를 신청했던 병원과 일대일 면접을 한 시간이나 보고 통과를 받아 그날로 병원 출입 카드가 주어졌다. 처음으로 가진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라 기분 좋게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글을 올렸다. '캐나다에 온 지 4개월 차가 되었고 일을 구하려 한다'에서 '캐나다에 온 지 4개월 차가 되었고 대학병원에 자원봉사를 하고 있으며 일을 구하려 한다'로 미세한 업그레이드가 되었다고, 농담 섞어 올렸었다. 나의 부모는 남들이 다 잘난 척할 때, 나는 외국에서 허송세월 보내며 (별 것도 아닐 게 분명한) 일을 구하고 있다고 글을 올리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그런 속얘기는 공개적으로 올리지 말라고 카톡이 왔다.
"너는 모든 날들을 사진처럼 다 떠올리는 거지? 어떤 왜곡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건 정말 부러워."
"인간은 어떤 식으로 떠올리지?"
"슬픈 거부터."
한 글자씩 혀로 뭉개는 듯한 느린 말투.
"내가 잘못했던 것들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나는 고고를 통해 그리움과 불안함이라는 감정을 다시 배웠다. 고고는 소설 속의 시점에서 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로봇이다. 추정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랑이 모래에 묻힌 고고를 파내고 수리해서 깨운 후에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고고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지카는 고고에게 천 년 전의 전투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니 살인기계였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고고에게선 근거 없는 추측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감정이 느껴진다. 랑과 함께 살며 갖게 된 '랑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라는 목적 밑에 사실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목적이 숨겨져 있다면 그것만큼 엇갈리는 것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고고는 로봇이다. 고고가 사막에서 만난 다른 로봇은 셋팅된 목적을 위해서라면 온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동할 뿐이었다. 고고는 랑을 소중히 여겨 랑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았었고, 랑의 죽음으로 그조차도 상실한 채 그리움을 따라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이 원래의 목적에 배반한 행동이거나 그저 흉내일까 봐 불안했다.
"감정이 뭔지 모른다. 내가 말을 얹을...... 주제가 아니었군."
"조금 전 네 말은, 꼭. 너도 감정이 있다는 말처럼 들려. 너는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것처럼 느껴져.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그렇게 느끼는...... 네가 감정을 느끼는 존재...... 기 때문이다."
"감정은 교류야. 흐르는 거야. 옮겨지는 거고, 오해하는 거야."
"이제 너를 로봇으로, 나를 외계인으로 부를 인간이 우리 곁에 없어. 그렇게 구분 지어 부를 필요성도 사라졌고. 혹 마지막 남은 인간마저 사라졌다고 생각해 봐. 그럼 너는 누구를 흉내 내고 있는 거야? 어떤 감정을 모방하는 거야? 인간은 사라졌고 너와 나만 남았다면."
"......그...... 내 것."
"완벽하지 않더라도 보기에 그럴싸하면 돼. 네가 감정을 진짜 느끼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느끼기에, 그 애가 그렇게 느끼기에 그렇다면 된 거야. 안 그래? 그냥 다 따라 하는 거야. 인간이라고 상대방에게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어? 영혼을 뺏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상대방에게 감정이 있다고 믿는 순간 생기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시치미 떼. 감정도 네 것이라는 듯이 행동해."
상실된 목적의 여정 끝에 답을 들었다. 네 마음은 진짜라는 대답과 함께, 고고는 다시 원하는 곳으로 갈 힘을 얻는다. 다른 대답도 있지만, 탄탄한 구성의 내용 흐름 이후에 듣는 대답에서 작은 성취감을 느끼는 독자의 재미도 있으니 굳이 이 글에서 공개하지 않는 걸로 하자.
나의 어릴 때 인생을 살려줬던 만화책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나는 견딜 수도 없이 좋아하는 것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어. 되고 싶은 것도 없고 지키고 싶은 것도 없어. 이렇게 말하면 화내니까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 안 해."
주인공의 친구가 이렇게 답한다. "들어봐 이비엔, 원하는 게 없는 삶이 그렇게 나쁜 거야? 허무한 인생은 살면 안 되는 거야? 학교를 나와서 평범하게 돈을 벌고, 그냥 남들처럼 일하고 휴일이면 공원에 가고, 평범하고 선량한 청년과 결혼해서 작지도 크지도 않은 집에서 살아도, 그래도 그 안에서 수많은 일이 일어날 거고기쁜 날도 있을 거고, 슬픈 날도 있을 거야. 살아가는 게 다 허망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그래도 커튼이 하얀 건 좋고, 뜰은 작아도 볕이 드는 데가 좋고, 가구는 호두나무가 좋다고 생각할 수는 있잖아. 많은 일을 해내고 세월이 흘러 고양이들과 손주들에 둘러싸이면 그때는 너도 태어나길 잘했다고 느끼게 될지도 모르잖아."
15살에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엄마에게서 들었다. 침대 옆에 쪼그려 울고 있는 나에게 아빠는 이런 일로 울지 말라고, 앞으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고 말했다. 그저 시험 성적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그 한 번의 사건 때문이라기엔 별스럽지만, 나는 깊은 공허함에 잠겼다. 친구와 수다도 떨고 떡볶이도 먹었다. 하지만 뭔가 가슴 한가운데 까만 구멍이 하나 있어서 근처를 스치는 모든 것이 똑같이 까매졌다. 좋아하는 것도 없고 취향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원하는 게 없다고 하면 지금 사는 삶이 만족스러우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살다가 만화책의 대사에서 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듯한 대사를 읽게 되었다. 허무한 인생이라도 살아가면 된다는 대사가 좋았다.
김영하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마음에는 언어가 없잖아요. 감정이거든요. 이 감정에 언어가 부여돼요. 소설에 표현된 문장을 읽으면서 그제야 아, 이런 것이구나 깨닫고, 그럼 그 감정을 훨씬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죠."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텅 빈 구멍을 책의 언어로 채워갔다. 심리학과 철학, 대화법에 관한 책을 즐겨 읽었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 감정이 금방 동화되며 슬픈 장면에선 가슴이 저미듯 아팠다. 커가다 보니 무엇을 입을지, 먹을지 점점 취향도 생겨났다. 119 구급대원이 되고 싶어 응급구조사를 택했고, 중간에 마음을 바꿔서 응급실에서 일하는 응급구조사가 되어 4년을 일했다. 남에게 필요한 직업을 고른 건지, 이 직업이 좋아 보여서 고른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나의 내면 아이는 15살에 갇혀있는지 그때보단 좀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 남아서 누군가의 필요에 드러날 수 있는 직업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삶이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거나 흉내를 낸 것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흉내를 냈으면 이제 내 삶이고 내 선택이겠지.
"고고, 너는 랑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거야! 네 마음은 진짜야!"
15살의 나는 이비엔과 라리에트가 살려줬지만, 28살의 나는 고고와 살리가 눈을 뜨게 만들어줬다. 눈도 떴으니 앞으로 조금만 더 헤매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