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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Nov 25. 2021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리 없다(에세이)

상식을 지키고 미련을 버리고 자신을 이기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나이가 든다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같다.
오르면 오를수록 숨은 차지만 시야는 점점 넓어진다.      

- 잉그마르 베르히만
(1918-2007 스웨덴 영화감독)          


나이가 들수록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많다. 예를 들면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것이다. 표출을 해서 확실히 해둬야 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침묵을 통해 유연하게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한다. 이걸 구별하는 지혜가 있다면 지나온 세월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다.


짜증 혹은 분노를 다른 것으로 정화하거나 승화할 지혜가 필요하다. 이걸 정신승리라 비하한대도 좋다. 나만 그런 게 아니면 그만이니까. 나이의 숫자가 오를수록 정신을 다스리는 지수도 함께 높아져야 하는 법이다. 구별과 대체는 성숙의 증거다.


시간이 흐르면
무뎌진다는 걸 잊지 말자.
그래야
감정에 온전할 수 있으므로.

감정적 충동에 속아
나를 잃지 말자.     
글/이동영 작가, 캘리그라피/@seulikes 인스타그램

이십 대에는 미처 몰랐다. 서른이 막 되어서까지도 알지 못했다. 마흔에 가까워지고 있는 요즘 내 일상을 온통 지배하는 건 나이에 관한 사유들이다. 세월은 가고 나는 덩그러니 남은 가운데 스스로 붙든 생을 위하여 끝까지 자신을 도울 책임을 생각한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혼자 견딜 능력이 있다면 그 힘이 클수록 성숙한 인간이. 언제고 자기 행복을 쟁취할 인간.     


새삼스럽지만 여전히 40(마흔)이라는 숫자는 멀게만 느껴진다. 아직 철이 덜 든 걸까. (아버지가 내게 군대를 일찍 다녀오면 철든다 해서 만 18세에 자원입대를 한 내가 20년 가까이 지나 마흔을 몇 해 앞두고 철이 덜 든 걸 우습게도 성찰하고 있다니!)


그래도 문뜩 네 살 터울의 친형을 보면 정확히 마흔을 실감한다. 지금과 별다를 게 없다는 것을 말이다. 건강을 챙겨야 하고, 부모님께 잘해야 하고, 과거의 상처나 사건에 매몰되지만 않는다면 그저 한 해를 똑같이 잘 살아내는 생의 한 기간에 불과하단 것을.     

가만히 있어도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러나 동시에 가만히 있어서 나이를 먹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견뎌온 것이고, 참아온 것이며, 버텨온 것이다. 기다린 것이고, 그리워한 것이며, 가슴 친 것이고, 입을 앙다물고 주먹을 꽉 쥐며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끝끝내 살아낸 걸 두고, 가만히 앉아서 세월에 상벌을 받은 것처럼 쉽게 말할 순 없다.


신형철 평론가의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책머리에 쓰여 있는 글이 떠오른다.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안 준 것이다. 여기 묶은 글들은 내 8년 동안의 생명 중 일부를 주고 바꾼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쓰면서 나는 죽어왔다. 그러나 이 글들은 지금 나에게 충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글을 쓰면서 죽어왔다’라는 저자의 표현이 가슴에 남았다. 내가 생명과 바꿔온 것들을 생각한다. 나도 부단히 죽어왔으리라. 여기까지. 비슷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오늘 쓴 글이 내 마지막 ‘유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문장을 재채기하듯 썼다. 그래서 간절하게 쓰고 그 절실함으로 치열하게 퇴고(推敲)를 한다는 말. 정작 이 그럴듯한 말에 책임은 못 지고 살아온 것 같다. 아, 말을 줄여야겠다.     


그렇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인정과 인내를 먹는 일이다.


삼키고 또 삼키는 일이다. 감정을 낮추는 일이다. 말을 줄여가는 일이다. 나이의 숫자가 올라갈수록 귀를 열고, 입을 닫는 횟수가 많아져야 한다. 결국 우리는 그 나이의 끝에서 영원히 침묵하게 될 테니까. 나이는 세월로 먹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다.     


이 때문이었을까. 굳이 타인에게 나이를 따져 묻지 않은 만큼 나 역시 말하지 않고 잘 세지도 않았다. 해마다 떡국은 맛있게 넘어갔고 자연스레 결혼은 하게 되면 하는 거라고 넘길 뿐이었다. 나이가 차면 서른이 넘는 정도이고, 그즈음 이립(而立)하는 어른이 되고, 그럼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살 것 같았는데. 이게 다 알고 보니 대단하고 과감한 분들의 성과를 그저 무념으로 상상한 거였다.

철이 덜 든 거였다. 계절마다 그답게 물드는 때가 있듯 나란 인간이 나답게 성장하는 변화를 알아차리는 일도 때가 있음을 잊어선 안 되는데 말이다. 예로부터 농사를 지을 때 계절의 변화를 잘 아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었다. 이를 뜻하는 순우리말이 ‘철든다’인데, 계절을 뜻하는 고유어를 ‘철’이라고 할 때, 이를 잘 알지 못하는 나같은 이를 두고 우린 철부지(-不知)라 불러왔다.


나무들이 제철이 되면 잎을 내고 꽃을 피우며 또 떨구듯이 철이 든 사람은 꽃을 피우고 고유한 향기를 내며 저마다 열매를 맺고 때맞춰 떨굴 줄도 안다. 새해가 밝아온다. 나이의 매무새를 정돈할 시간이 오고 있다.   

  

당신은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가?

상대의 고통에 공감하는가?

나의 탓으로 돌아보는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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