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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May 01. 2019

"이만하면 잘 살아온 것 같습니다."


엄마 나이 또래였던 환자분이 있었다.

선한 눈빛의 그녀는,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곳이 없는지 물어보면 늘 옅은 미소와 함께 답을 해왔다.


"고마워요. 수고하셨어요."


간호사가 처치한 뒤에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를 생략한 적이 없었다. 선한 그녀의 눈빛에 이끌려, 나는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살피고 싶었다. 그녀가 힘든 점이 있다면 먼저 나서서 돕고 싶었다. 말기 암환자였지만 그녀는 의연했다. 통증을 느끼는 간격이 짧아지고 속이 메슥거려 물도 더는 먹을 수 없는 상태인 데다가 폐 기능까지 저하돼 지속적으로 산소를 공급받아야만 겨우 연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두려워한다거나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게 몸에 배어 있던 그녀였기에, 아마도 자신이 불안한 감정을 표현한다면 가족들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는 고통과 불안을 속으로 홀로 삼키며 이를 내색하지 않고 차분함을 유지했다.


여느 때처럼 나는 환자들의 활력 징후를 측정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그날따라 기력이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 가장 먼저 발걸음을 향했다. 안 그래도 부어있던 몸이 더 심해진 상태여서 이제는 혼자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불편한 점을 묻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침상에 누워 있기만 했는데도 오늘따라 더 어지럽다고 전해왔다. 


혈압을 측정해보니 수치가 정상 미만으로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생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듯 보였다. 담당 의사에게 알리고 그녀를 집중적인 처치가 가능한 치료실로 이동시켰다. 혈압을 높이기 위해 다량의 생리식염수를 빠르게 주입했으나, 그녀의 혈압은 변동이 없었다. 반복적으로 주입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혈압을 상승시키기 위해 승압제 투약을 시작했다. 약물을 주입했음에도 혈압은 반응이 없었다. 담당 의사는 승압제 투약 용량을 두 배씩 늘려보자고 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담당 의사가 그녀의 남편을 치료실 밖으로 불렀다. 하루, 이틀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말을 그에게 전했다.

의사의 말대로 혈압이 계속 떨어진다면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인 게 맞았다. 그녀의 의식이 온전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전히 선한 눈빛은 또렷하고 선명했다. 분명 아주 어지럽고 힘들 텐데도 언제나처럼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당신에게 곧 임종이 가까워져 온다는 것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듯 보였다. 크게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아프게 다가왔다. 그런 그녀에게 자꾸만 마음이 쓰여 나는 수십 번의 발걸음을 그녀에게로 향했다. 상태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남편이 머뭇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그래도… 아내가 정말 잘 살아온 것 같아요.
제가 젊을 적에 사업하면서 힘들 때가 많았거든요. 여보, 그랬지?
그 조건에서도 꿋꿋하게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냈어요.
저는 아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함께 노력해준 게 정말 고마워요.
정말 잘 살아왔어요.



그는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아마도 아내와 단둘이 있을 때 직접 말하기에는 조금 쑥스러우셨던 모양이다. 내게 이야기를 해 왔지만, 그것은 아내를 향해 뒤늦게나마 진심 어린 사랑을 전하려는 듯 보였다.


죽어가는 내게 누군가 그녀의 남편처럼 이야기해준다면 어떨까. 물론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크게 감동을 한다거나 감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가족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미안한 마음쯤은 조금이나마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도 남게 될 가족들이 눈에 밟히겠지만 그때, 가족의 진심 어린 마음과 사랑이 있다면, 떠나는 이의 짐을 조금은 덜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껏 함께해서 행복했고, 우리 정말 잘 살아왔다.”라는 말은 그래서 내가 죽기 전에 듣고 싶은 말이 되었다.


남편의 진심을 전해 들은 그녀는 하루를 채 넘기지 못하고 평온히 눈을 감았다. 감사하게도 나는 그녀를 통해 ‘죽음이 반드시 허무한 것만은 아니구나. 내 마지막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의 끝까지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리고 그와 함께 걸어온 인생이라면, 내게 찾아올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게 아니다. 함께 해온 이들의 기억 속에는 내가 여전히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육체는 사라졌어도 내 영혼은 그들에게 추억될 수 있다. 그녀의 영혼 또한 그녀를 사랑했던 가족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언제까지나 추억될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그녀를 이따금 추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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