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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Apr 11. 2021

철학, 그리고 나의 이야기

철학이 던져준 나에 대한 질문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열 다섯 살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학기가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던 때였다. 도덕 교과서에 이런 말이 등장했다. 정확히 옮길 순 없지만 청소년이 되면 사람은 대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고. 어느 누군가에겐 그냥 스쳐지나갈 지루한 교과서의 한 문장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한 마디였다. 처음으로 '난 누구지?'라는 철학적 물음을 던진 이후, 그 물음 앞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부터였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정말 그랬다! 심지어 밥 먹을 때도 밥을 먹으며 생각을 했으니까.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타고난 달리기 선수가 잘 달리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어느 순간엔 한 달간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는 결심으로 살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자 그냥 생각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찾아온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


나의 생각은 이랬다.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다. 나에 대해 내가 모르는데, 어떻게 나로서 살아간다 말할 수 있을까. 달리 보면, 내가 나에 대해 모르는데 잘 살 수 있을까? 나답게 살지 못한다면 그 삶이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나다운 건 또 무엇일까. 그리고 산다는 건 또 무엇일까. 또 의미있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의 청소년기는 이 질문들과 함께 진지하고 심각하게 지나갔다.


그렇게 철학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철학과가 정확히 뭘 공부하는지도 몰랐던 당시였는데, 어쩌다 보니 철학과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공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고 부모님과 주변의 강렬한 반대에도 꿋꿋이 철학과를 지원했다. 누군가에게 ‘철학관’을 차리면 돈을 잘 벌겠다는 얘기도 들었다. 당연, 사주를 보는 철학관과 철학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르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철학과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철학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지점에서 다들 의아해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싯다르타 역시 그런 사람이 아니었냐고. 그들이 이야기를 안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이젠 너무나 ‘철학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일 뿐 결코 ‘내’가 아니었다. 내 삶을 지고 가는 이는 결국 '나'이니까.


그렇다고 철학 공부가 무의미하진 않았다. 좀더 깊게 사고할 수 있었고, 좀더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고, 더 논리적으로, 더 고차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방법을 익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질문’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결국 문제의 해결은 그것에 대한 정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에 이른다는 중요한 사실도 깨달았다.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나란 누구일까?'라는 질문과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은 전혀 다르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어떤 가치를 지키며 살 것인가?’라는 질문 역시 다르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 또한 다르다. 다양한 질문을 던지다 보면 자신에게 필요한 질문을 찾을 수 있고, 그 질문이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그래서 질문은 길잡이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해답이 되어준다.


진정 '나답게' 살기 위해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일은 결국 ‘나답게’ 살고자 하는 데 있다. 내가 세상에서 별로 반기지 않는, 밥먹고 살 기술 하나 가르쳐주지 않는 철학과에 간 것도 ‘나답게’ 살다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너처럼’도 아니고 ‘너답게’도 아니다. 내가 가진 기질과 조건을 인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런 기질과 조건들을 극복하거나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사는 일이 진정 나답게 사는 일이다. 물론 어렵다. 그렇지만 의미 있다.


*블로그 바스락(홈피)

https://www.basol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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