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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Mar 10. 2024

2장 이것과 저것을 넘어서는 힘, 통찰

애매모호함에 대한 여유를 가지며

원문은 생략했다. 한글로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괄호 안의 부연 설명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본문


세상 모두가 아름답다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는(절대적으로) 혐오스러울 수 있고, 세상 모두가 선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는(절대적으로) 선하지 않을 수 있다. 있음과 없음도 상대(그 반대)가 있어야 생겨나고, 어려움과 쉬움도 상대(그 반대)가 있어야 성립되며, 길고 짧음도 상대(그 반대)가 있어야 비교가 가능하고, 높고 낮음도 그 상대(반대)가 있어야 기움이 있으며, 음악과 소리도 그 상대(반대)가 있어야 리듬이나 멜로디가 발생하고, 앞과 뒤도 그 상대(반대)가 있어야 앞서고 뒤따름이 생긴다.


그리하여 성인은 무위(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방식)로 모든 일에 대응하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억지로 교정하기보다 몸소 보여주는)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거부하거나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무언가 주어져도 소유하려 하지 않으며, 수고스러운 일을 하더라도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으며, 어떤 공적을 쌓더라도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머무르거나 집착하지 않으니 그 어떤 것도 그를 떠나거나 그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생이불유 위이불시, 2장의 중요 구절. (함 써봤다)

해설


1장에서 보있듯 인간이 모르는 것은 너무나 많고 아는 것은 너무나 적다. 안다 해도 인간이 만든 지식을 벗어날 수 없다. 이 무한한 우주에서 인간이 알고 있는 얼마나 될까. 무엇이 옳다고 믿고 상대를 이상하다 단정짓는 순간 갈등은 시작되고, 그 갈등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은 자기와 자기 상황을 쉽게 벗어나질 못한다.


노자는 어떤 이는 이것이 아름답다, 어떤 이는 저것이 아름답다, 주장하는데, 과연 그것에 절대적 기준이 있는지를 묻고 있다. 다른 쪽 입장에 서면 다를 수 있다. 한 사람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혐오(밉다)스럽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함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가 선하다 여기는 것이 다른 이에겐 선하지 않을 수 있고, 선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다른 이에겐 선할 수도 있다. 흔히 노자의 ‘인식론’으로 부르는 이 장에서, 노자는 인간이 가진 한계에 대해 지적하고, 이를 넘어서는 통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살다보면 그렇다. 난 이게 맞다 보는데, 상대는 아니라 말하고, 답이 있는 사실에서도 서로 어긋난 반응을 보이기도 하다. 그럴 땐 슬며시 내 주장을 내려놓는 아량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죽어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너무나 이해하기 어렵고 세상은 참 아이러니하다.


있음과 없음도, 어려움과 쉬움도, 높고 낮음도, 음악과 소리도, 앞과 뒤라는 인간의 가치 기준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누군가에겐 쉬운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어려울 수 있다. 멜로디나 리듬도 다른 음들이 서로 만나야 이루어진다. 세상 모든 일이 이러하니 어떻게 무엇으로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애매모호함에 대한 여유를 가져야 한다.


지구는 평평하다고 주장하거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과거의 주장들은 이제는 지구는 둥글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로 바뀌었다. 오랫동안 인간을 옥죄어 왔던 창조론 역시 진화론에 의해 바뀌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간의 믿음 역시 계속해서 바뀌어 간다. 실제 우주도 끝없이 변하지만, 인간의 믿음에 따라 세상이 변할 수도 있다.


있는 것도 언젠간 사라지고, 없는 것도 어느 순간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이 높다 하는 것이 얼마나 높아야 높다고 말할 수 있을까. 땅에서 보면 에베레트산과 동네 뒤산의 차이는 크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의 키 차이도 부유함의 차이도 너무 크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저어 멀리 우주에서 보면 산의 높낮이도, 외모도, 가진 것이 차이도 ‘별 게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단정지을 수 없으니 회의적이거나 내맘대로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인식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그렇다는데 니가 왜?!’라고 히는 순간 사회는 쉽게 무너진다.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인(깨달은 자 또는 훌륭한 사람)은 이런 것들을 굽어보는 통찰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무리하지 않고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며, 잠시 판단을 미루고 비판을 멈추어 자기자신을 먼저 돌아본다. 한참의 숙고 뒤에 행동이 뒤따른다. 옳고 그름보다 그것을 고집부릴 때 위험은 더 커지기 마련이니까.


이를 가리켜 ‘무위’라 부르고 말없는 가르침이라 부른다. 무위에 따르니 성인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무슨 일이든 맡고, 그 공적에 집착하지 않는다. 일이 되어가는 게 더 중요하고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인은 할일 안 할일 마다하지 않고 주어지는 일을 기꺼이 자기의 일로 받아들이는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성인은 사적인 마인드보다 공적인 마인드가 장착되어 있는 사람이다. 세상사가 잘 돌아간다면 본인이 애쓴 것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어른”이다. 사회에 이런 어른들이 많다면, 무위라는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면, 살아가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여유롭지 않을까.


*관련 도서(내 책)

•2023 세종도서 선정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철학>(믹스커피)​

•살림지식총서591 <도가>(살림출판사)​


*블로그 바스락(홈피)

https://www.basol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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