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뽀시락 Mar 07. 2024

1장 삶에 대한 긍정, 부와 풍요의 열쇠

비록 모든 걸 다 알지 못하더라도

원문은 생략했다. 한글로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괄호 안의 부연 설명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본문


도(道, 전체/우주/하나)는 ‘도’라는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는데, 언어(인간의 생각과 감각)를 통해서는  그것의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名, 부분/언어/다수) 또한 마찬가지여서, 이를 또다른 개념으로 규정한다 해도 그것의 실체를 완벽하게 드러내진 못한다.


그리하여 천지(물리적 시공간이자 삶의 현실)가 시작되는 지점을 무명(규정할 수 없는 무엇)이라 일컫고, 온갖 만물이 비롯되는 지점을 유명(규정할 수 있는 무엇)이라 일컫는다. 항상 없음(無, 이름붙일 수 없는 존재 양태)에서 미묘함(우주 또는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고, 있음(有, 이름붙일 수 있는 존재 양태)에서 테두리(우주 또는 존재의 경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둘(무와 유)은 전혀 다른 영역이 아니라 어떤 하나를 가리키는(또는 어떤 하나를 드러내는) 서로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무명과 유명을 똑같이 ‘까마득하고 아득하다’고 표현하는데, 까마득하고 아득한 가운데에서도 더 까마득하고 아득한 곳(어둠 속 어둠이나 안개 속 안개 마냥)에 비유할 수 있다. 이에 ‘모든 비밀(신비롭고 오묘한)의 문’이라 일컫는다.



해설


동양고전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 가장 앞에 등장한다. 일종의 총론. 머리말이자 핵심. 그래서 오래 전부터 <도덕경> 1장의 해석을 두고 많은 말이 오갔다. 첫 장을 어떻게 번역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내용들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공사의 기초, 조감도 또는 설계도라 이해할 수 있다.


1장은 우주론으로 본다. 물리학이나 천체학에서 보는 우주라기보다 고대 사람들이 바라보는 우주에 대한 해석이자 인간이 자신의 삶을 실현하는 시공간 또는 현실적인 생활공간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인생을 이렇게 바라봐야는 자기 주장을 담았다. 이는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노자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인식하라고 주문한다. 노자는 언어(여기에서는 이성, 감각 등 인간의 지식 및 인식)를 통해서는 이 세계(우주)를 정확하게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언어는 한계를 갖기에 그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에 대해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의 실체도, 이름(개념)의 실체도 파악할 수 없다 보았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 중 하나는 ‘이름(명)’의 해석이다. 이름이란 구분이자 부분이고, 언어이자 제도이며, 다수이자 개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과 세상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의식적인 요소와 그에 따른 결과물인 문화와 문명을 모두 아우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 이외의 것과 이 우주 모든 것이 곧 도이다. 노자는 인간의 의식으로 어떤 것을 포착하는 순간, 그것은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보았다.


물론 인류는 기술과 과학 같은 자기만의 도구를 만들어 문명을 발전시키는 종족이긴 하지만, 그것 역시 보잘것없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계속해서 새로운 발견이,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고 있다. 무언가를 새롭게 파악할수록 더 새로운 미지의 영역이 등장한다. 이것이 끝인가 하면 저것이 나타나고, 저것이 나타나면 또다른 무엇이 등장한다. 짜잔-!


우주를 보라. 빅뱅과 혼돈과 암흑물질과 수많은 차원들이 존재한다. 인간이 우주로 로켓을 보내고 탐사를 하지만 이제 겨우 태양계를 살짝 벗어난 정도에 불과하다. 이 역시 위대한 업적이나 이 우주가 가진 거대함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정도이다. 사실, 인간이 가진 감각이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가 얼마나 작은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 역시 세계의 본질이자 진실을 가리키는 ‘이데아’는 이성이 아닌 직관의 영역으로 보았다. 그들 역시 인간이 지닌 언어의 한계를 알았고, 인간이 결코 다다갈 수 없는 삶의 영역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 본질에 대해 노자는 ‘까마득하고 아득하다’ 표현한다. 그런 우주를, 그런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와 법칙을 가리켜 도라 말한다.


아득하고 까마득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에 휩싸인 세계. 이를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겨우 우주 먼지를 이루는 아주 작은 끝자락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좌절하란 의미도, 아무것도 하지 말란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삶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인생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한데 뒤섞여있고,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함께한다. 어느 하나로 인생을 규정할 순 없다. 기쁜 날이 있는 것처럼 슬픈 날이 있기 마련이듯 삶은 그런 변화의 연속이다. 바로 이 사실을 바로 알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무이자 유, 무한과 유한이자, 존재(우주)의 본질이자 그 경계이다. 빛과 어둠이 갈마들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선과 악이 교차하는, 보이는 영역과 그러나지 않는 영역이 큰 전체를 이루는, 온갖 희노애락이 뒤섞인, 그 속에서 우린 아주 작은 인간 존재로 살아간다.


노자는 이 무한과 변화의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좋은 방법은 우리 사는 세상은 이미 충만하고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에 있다고 본다. 그러니,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애쓰고 무리할 것이 아니라, 너무 무리하지 않으며 현재에 만족하는, 그런 삶이 더 충만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바로 삶에 대한 긍정!


노자에 있어 중요한 가치인 비움도 고요함도 버림도 부드러움의 가치도 우리 사는 세상과 우주가 살만한 곳임을 긍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곧 노자가 말하는 도에 따르는 삶이고 덕을 기르는 일이며, 무위라는 삶의 방식이다. 그 부와 풍요의 세상이 당신 앞에 놓여있다. 이제 그 비밀의 문을 열어보자.



•일종의 머릿말. 노자 도덕경을 왜 ‘부와 풍요’라는 주제로 바라보았던 이유를 실었다.

https://www.basolock.com/richness-taoteching/


*관련 도서(내 책)

•2023 세종도서 선정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철학>(믹스커피)

•살림지식총서591 <도가>(살림출판사)


*블로그 바스락(홈피)

https://www.basolock.com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