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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May 05. 2024

도덕경 19장 본바탕을 중요시하고 욕심을 줄여라

일상과 시민이 만드는 세상

원문은 생략했다. 한글로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괄호 안의 부연 설명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노자 도덕경 19장 번역 및 해설


본문


성스러움을 내던지고 지혜를 버린다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가 될 것이고, 인을 내던지고 의를 버린다면 백성들이 효도와 자애를 회복할 것이며, 교묘함을 내던지고 이익을 버린다면 도적떼도 사라질 것이다.


이 세 가지는 표준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그리하니 다음의 기준을 따르라.


“본바탕을 드러내고 원형의 본질을 간직하라. 자아(에고)를 따르지 말고 욕심을 줄여라.”



해설


고귀함이나 성스러움은 고대로부터 일반 백성과의 차별을 두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유럽의 중세를 보더라도 왕이나 귀족의 고귀함(잔치나 벌이고 부패를 저지르는 등의 전혀 고귀하지 않음에도) 또는 종교의 성스러움(잘못된 종교인이 저지르는 불건전한 행태와 같이 전혀 성스럽지 않음에도)을 강조하며 다른 계급과의 거리를 두었다.


인이나 의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이를 두고 유가에 대한 도가의 비판이라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여기에 가두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통치자들은 이러한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비록 그렇게 도덕적이지 않더라도 그들이 다스리는 백성들에게는 그러한 것들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일종의 자체 검열이랄까.


미국을 보더라도 미국의 주류 사회인 전통적인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은 낙태에 대해 반대하고 결혼을 중요시하는 등 오랜 세월 그들을 지탱해온 가치관들을 중요시한다. 20세기 미국을 강타했던 히피 문화나 신비주의, 그리고 길거리 문화나 흑인 문화 등도 당시에는 반사회적인 문화 코드였다. 물론 지금은 대중문화의 주류 요소로 기능하고 있지만.


결혼과 낙태에 대해 문제이다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미국에서는 낙태가 이슈이나), 18장에서도 보았듯 무언가를 강조하고 무언가를 금지하는 정치적 행위에는 반드시 의도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민들의 사회적 합의가 아닌, 사회적 합의를 가장한, 나아가 통치를 담당하는 정부 자체의 독단일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나쁜 통치자들은 교묘하다. 나쁜 통치자는 백성을 통치하기 쉽게 만들기 때문이다. 백성들 스스로 자신들이 옳다 믿는 것을 행하도록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이 원하는 것을 백성들 스스로 원한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프레임이자 정치적 가스라이팅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실현한다.


반면, 좋은 통치자는 반대로 백성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자유를 준다. 언뜻 보기엔 매우 혼란스러워 보이나 그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어쩌면 자유를 가진 시민들이 사는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 자유가 잘 정착한 민주주의 사회일수록 토론이 활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토론이 자주 이루어지는지를 떠올려 보면 그렇다. 무엇보다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사회의 의식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이기도 하다.


시민사회의 의사소통에 관한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던 20세기의 중요한 학자 중 한명이었던 하버마스는 국민들의 여론을 수렴하는 역할로 공론장과 시민사회를 강조한다. 비판적 합리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공론장(아테네의 아고라 광장마냥)과 이러한 시민사회가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 활기를 띠고 여론을 표출하는 형태를 가장 이상적으로 여겼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건전한 시민사회가 살아있는 반면에 이를 저지하거나 이에 반하는 움직임도 여전하다. 특히나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 견제와 같은 언론 본연의 역할이 사라진지 오래이고(20세기부터 그래왔지만) 새로운 미디어의 가능성을 열었던 유튜브와 같은 sns에서는 근거없는 주장과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있다. 사회의 권리를 대변하는 대신 사익을 추구하는 사회 단체들도 여럿이다.


진정 하버마스가 말한 합리성과 비판의식을 가진 시민들은 잠잠할 뿐이다.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할일을 하며 세상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래서인지 노자가 제시한 해답이 여전히 유효한지도 모른다. 뭔가 덧대려 하지 말고 백성들이 본마음(고요한 마음)을 간직하게 만들고, 욕심에 따라 들뜨거나 의기소침하여 가라앉는 대신 담담히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19장에서 언급했던 대도의 길이겠지. 큰 원칙과 상식 따위가 무너질 때에도 일상이 유지된다면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는다. 9.11 사태가 벌어진 미국에서 당시 부시 대통령이 내린 처방은 ‘쇼핑을 즐기세요’라는 말이었다. 쇼핑을 즐기란 의미가 아니라 쇼핑으로 대변되는 일상이 유지돼야 더 큰 위기로 번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상은 수많은 시민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관련 도서(내 책)

2023 세종도서 선정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철학>(믹스커피)

살림지식총서591 <도가>(살림출판사)


*블로그 바스락(홈피)

https://www.basol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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