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하고 실속을 차리다
원문은 생략했다. 한글로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괄호 안의 부연 설명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최고의 덕(上德)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덕을 덕이라 여기지 않기에 진짜 덕이 될 수 있고, 보통의 덕(下德)을 지닌 사람은 자신이 덕을 잃었다 여겨(자기 탓으로 덕을 잃어서가 아니라 덕이 나갔다 여겨) 덕이 없는 것이다.
최고의 덕을 지닌 이는 무위에 따르기에 억지스러움이 끼어들 틈이 없지만, 보통의 덕을 지닌 이는 무리하여 무언가를 하고자 하기에 억지스러움이 끼어든다.
최고의 인(上仁)을 지닌 이는 무리하여 무언가를 하고자 하지만 억지스러움이 끼어들 틈이 없고, 최고의 의(上義)를 지닌 이는 무언가를 하고자 하고자 하기에 억지스러움이 끼어든다. 최고의 예(上禮)를 지닌 이는 무리하여 무언가를 하고자 하지만 그에 따른 응답(결과)이 없어 소매를 걷어붙이고(직접 나서서) 끌어당긴다(종용한다).
그리하여 도를 잃은 다음에 덕이 있고, 덕을 잃은 다음에 인이 있으며, 인을 잃은 다음에야 의가 있고, 의를 잃은 다음에야 예가 있다. 예란 충성과 신뢰가 옅어지면 강조하는 가치로, 혼란의 시작에 다름없다.
어설픈 인식(前識)을 지닌 사람은 도의 화려함이자 우매함의 시작이다. 그리하여 대장부는 후한 사람이지 얇은 사람일 수 없고, 실속을 차릴 뿐 겉치레에 신경쓰지 않는다. 곧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버린다.
노자 도덕경은 1-37장까지를 도경으로, 38-81장까지는 덕경으로 구분한다. 이 38장에서 덕에 관한 내용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도와 덕에 대한 노자의 깨달음을 전하는 경전이란 의미에서 <도덕경>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처럼 도에 관한 내용으로 대표되는 1장과 덕에 관한 내용으로 대표되는 38장을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다.
물론 1-37장까지 오로지 도에 관한 내용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38-81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오로지 덕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1-37장까지 전반적으로 도란 이러저러하다는 내용이 등장하고, 38-81장에서 이를 덕과 결합한 내용이 등장한다. 판본에 따라서는 38장이 1장보다 먼저 등장하기도 한다.
노자는 최고의 덕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덕을 덕이라고 여기지 않아 덕이 있다 본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덕을 의식하며 덕을 베풀진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최고의 덕을 지닌 사람은 후한 사람이이 얇은 사람이 아니다. 가볍게 행동하지 않고 날 베푸는 사람이다. 또한 실속을 차리지 결코 겉치레에 신경 쓰지 않는다.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의 차이다.
38장에서 노자는 수행과 인식의 단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도의 단계와 도를 얻은 덕의 단계, 도와 덕을 잃은 단계인 인, 의, 예의 단계이다. 인, 의, 예의 단계를 노자는 어설픈 인식(前識)이라 규정한다. 농익은 통찰도 높은 차원의 인식도 아닌 감각에 의존하거나(인간의 감각이 오류기 많다는 점에서) 편협한 지식에 의존하는 것을 가리킨다.
불교에서도 인간의 감각에 의존하는 지식을 가리켜 ‘다섯 가지 어설픈 인식(前五識)’이라 부른다. 그것은 눈의 감각인 시각, 귀의 감각인 청각, 코의 감각인 후각, 입의 감각인 미각, 몸의 감각인 촉각이다.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의식의 단계를 다시 세 단계로 구분한다. 낮은 단계 의식, 깨달음에 이르기 직전 단계, 깨달음의 단계. 노자가 도와 덕의 단계와 도와 덕이 사라진 단계를 구분하는 것도 이런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진리와 법칙이 살아있는, 다시 말해, 상식과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는 도와 덕이 있는 곳이고, 상식과 정의가 죽은 사회는 도와 덕 대신 인, 의, 예가 있는 곳이다.인, 의, 예가 유가에서 중요시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유가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어떤 가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사례이기도 하다.
덕은 보통 득(얻을 득)으로 보아(한자는 음이 통하면 뜻이 통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얻는 도’를 가리킨다. 덕은 어떤 사람이 진실하게 수행하여 이르는 높은 차원의 인식 단계이다. 또는 덕을 베푼다는 말처럼 사회적인 공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러 방식으로 사람들을 돕는다거나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 사회적 기여를 하는 것들이 모두 덕이다.
고대 철학을 보면 일면 공통점이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 역시 진리와 법칙이자 한 인간이 갖는 높은 인식의 차원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노자가 말한 도와 덕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한 사회가 갖는, 그리스인들의 공통체인 폴리스가 갖는 정의와 공정, 상식과 도덕이 올바르게 정립되기 위해 그 표준으로 ‘이데아’를 말했다.
플라톤은 인간이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현상의 거짓을 보고 있다고 말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가진 최고의 탁월함에 이르는 것이 곧 이데아의 실현으로 보았다. 마치 세상에 도가 있는데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고, 사람에게 덕이 있는데 그 덕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 둘을 등장시키는 것은 더 어려운 이야기로 빠질 수 있으나, 철학적으로는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도와 덕은 결국 이상적인 세상과 이상적인 인간의 실현을 의미한다. 그것이 아주 특별하고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무엇이라기보다 인간이 꿈꿀 수 있는 또는 인간을 넘어 세상 모든 존재가 조화와 화합을 이루는 상태이다. 그래서 도달하기 어렵지만 그래거 추구해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곧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데아이고, 공자가 추구한 대동사회이자 부처가 말한 중생 구제의 길이다.
* 노자 도덕경 1-30장은 아래에서
https://brunch.co.kr/brunchbook/taoteching
*관련 도서(내 책)
2023 세종도서 선정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철학>(믹스커피)
살림지식총서591 <도가>(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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