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하고 억센 것들을 피해
원문은 생략했다. 한글로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괄호 안의 부연 설명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으며,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에 업고 ‘양’을 껴안아, 기氣가 서로 합하여 조화를 이루면 ‘충기沖氣’가 된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은 ‘외로운 자’, ‘부족한 자’, ‘가난한 자’ 같은 것들로 이는 왕이나 후작들이 자신들을 지칭히는 말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이치란, 때론 손해가 이익이 되고, 때론 이익이 손해가 된다.
사람이 배워야 할 것을 나 또한 가르침으로 여기는데, 딱딱하고 억센 것은 죽음을 얻을 뿐이니, 나는 이를 가르침의 으뜸으로 여길 것이다.
조금 어려운 철학의 질문을 던져보자. 온갖 사물이, 수많은 존재가 있는 우주가 어떻게 통일성을 지닐 수 있을까? 반대로 이토록 수많은 변화와 다양성을 지닌 우주가 거대한 하나로 존재할 수 있을까? 물론 이것은 철학의 질문만은 아니다. 현대 과학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대 그리스 시대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미네데스를 살펴보자.
우선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유명한 명제로 유명하다. 강이란 물의 흐름이다. 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끝없는 변화를 겪는다. 1분 전 발을 스쳐지나간 물은 이미 1분 후의 지점으로 흘러갔다. 그 와중에 약간은 증발하고 다른 물과 섞이기도 한다. 그러하여 우린 결코 같은 강을 만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린 이 강을 같은 강으로 여긴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생각해 보면, 내 몸 안의 세포는 매일 매일 엄청난 개수가 죽고 살아난다), 모든 것이 달라지진 않는다(생각해 보면, 어제의 내가 갑자기 변신을 하여 다른 사람이 되거나, 갑자기 큰 사고가 나서 형체를 못 알아볼 정도가 되거나).
다음으로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란 생멸하거나 변화하거나 운동하지 않는다. 뭐라는 건지, 순간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런데 차분히 생각해 보자. 우리집 떡갈나무를 떡갈나무로 인식하는 것은 그 떡갈나무가 갑자기 대나무가 되거나 야자나무로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하는 가운데에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까?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 법칙과 실체를 찾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노자의 42장 첫 문장은 이런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도 하나 둘 셋 만물’이라는 구조 속에서 세상 만물의 분화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반대로 다양한 개체를 아우르는 만물은 도라는 하나의 큰 덩어리로 수렴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분화되는 과정은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수렴하는 과정은 파르메니데스처럼 이해해볼 수 있다.
또한, 노자는 우주를 이루는 두 가지 기인 음과 양의 조합과 분산으로 또 다른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차갑고 드러나지 않고 가라앉아 있는 것이 특징인 음을 ‘등에 업고’라고 표현했고, 따뜻하고 드러나고 떠오르는 것이 특징인 양을 ‘가슴에 안아’라고 표현했다. 만물은 각각 이 두 가지 기를 갖고 태어나고 이 두 기가 서로 합해 조화를 이루는데, 이를 가리켜 ‘충기沖氣’라고 표현했다.
한편, ‘외로운 자’, ‘부족한 자’, ‘가난한 자’는 39장에서도 나왔던 내용이다. 노자는 귀한 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기초로 한다고 여겼다. 세상이 조화를 이루려면 높은 것이 높은 곳에만 있어서도 낮은 것이 낮은 곳에만 있어서도 안 된다. 같은 물에 두 번 담글 수 없는 것처럼 유연함이 있어야 하고, 반면에 커다란 하나로서 움직이기 위한 엄격함도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노자는 딱딱하고 억센 것은 죽음을 얻을 뿐이라 보았다. 죽으면 모든 것이 멈추면서 딱딱해지고 생명이 사라지고 활기가 빠지면서 억세진다. 시체가 딱딱해지는 것이 그렇고, 나무나 풀이 마르면 그렇다. 노자가 부드러움을 강조한 이유는 당시 세상에 이러한 딱딱하고 억센 것만 존재해서일 수도 있다. 형벌과 전쟁만이 존재하는 그런 곳엔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39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후왕이 자신들을 천한 것에 비유한 이유는 스스로 자신들의 욕망을 경계하여, 백성들을 돌보아야 하는 자신들의 본분과 의무에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과 자신의 권력에만 취한 위정자들과 그들에 기생하는 부역자들은 백성을 기만할 생각만 할 뿐이다.
일상도 그렇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원하는 것을 가지려면 그만큼의 희생과 노력이 뒤따르거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세상에 사기가 판치고 인스타그램에 잘난 것만 가득한 이유도 모두가 그런 것들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실제로 가진 이들은 극소수이고 그것을 가진 후에는 그렇게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음과 양이 서로를 업고 껴안아 조화를 이루듯, 그런 노력이 있어야 인간 공동체가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다. 36장에서 보았던 희미한 밝음 또는 흐릿한 경계가 가능하기 위해 노자는 부드럽고 몰랑한 것들을 중요시 한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업고 껴안기 보다는 내팽겨치고 외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딱딱하고 억센 것들만, 그런 방향이 너무 지배적인 곳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노자 도덕경 1-30장은 아래에서
https://brunch.co.kr/brunchbook/taoteching
*관련 도서(내 책)
2023 세종도서 선정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철학>(믹스커피)
살림지식총서591 <도가>(살림출판사)
*블로그 바스락(홈피)
https://www.basolock.com/phillit-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