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어디엔가 있게 된다. 사람의 육체는 무형(無形)이 아니므로 어디엔가 존재하는데 그럴 때의 공간은 단순히 ‘공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공간이 사람에게 의미 있는 곳이 되면 그 때는 그 공간을 ‘장소’라고 한다.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부터 그렇게 말했고, 지금까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공간에는 속해 있지만 그 공간이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없으면 그 공간은 그냥 '공간'일 뿐 '장소'는 아니다. 같은 공간도 단순한 공간(space)이 될 수도 있고 의미 있는 장소(place)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좋은 장소를 'Hot place'라고 한다.
나를 포함하는 추억이 입혀진다면 그 곳이 나의 Hot place가 되는 것이다.
유년 시절에 김포공항 정문 가까운 곳에 살았다. 친구들과 김포공항 안에 들어가서 에스컬레이터를 자주 타곤 했다. 그 당시 내가 아는 한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건물은 김포공항뿐이었기 때문이다.
경비 아저씨들의 눈을 피해 전광석화처럼 에스컬레이터를 즐기고 난 후 냅다 도망을 쳤다. 여러 명이 몰려다니면 눈에 띄기 쉽기 때문에 흩어져서 사주경계를 하다가 일제히 에스컬레이터로 뛰어가 여유 있게 승차감(?)을 즐기고 쏜살같이 도망치는 것이다. 마치 갑자기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흩어지는 플래시몹을 연상케 하는 짓이었다. 어느 날에는 순간적인 착각으로 상행을 타야 하는데 나만 혼자 하행을 타는 바람에 밀려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 계단에 휩쓸려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은 적도 있다. 호루라기 불며 쫓아오는 경비 아저씨를 피해서 죽을 힘을 다해 뛴 적도 있었다. 신나는 추억이다.
어른이 되어 가끔 김포공항을 이용할 때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지만 그건 내가 유년 시절 타본 그 에스컬레이터도 아니고 숨었다가 몰래 즐겼던 그 에스컬레이터도 아니다.
공간은 남아 있고 장소는 사라졌다.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면 그 곳이 나의 Hot place가 되는 것이다.
초등학생 때 신당동 떡볶이 골목에 가끔 갔었다. 물론 그 때는 떡볶이 골목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었다. 허름한 판잣집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고 길바닥도 비포장이었다. 늘어선 판잣집 중 한 집, 간판도 없는 그 집이 내가 알고 있는 원조 떡볶이집이다. 그 당시에 신당동에 있는 그 떡볶이집 한 곳을 제외한 모든 떡볶이집의 양념은 빨간 고추장이었다. 까만 양념장을 사용한 그 '원조 떡볶이집'만이 명실상부 '원조'인 것이다. 고추장 대신 춘장같이 까만 양념장만을 넣고도 신기할 정도로 맛있는 떡볶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가 괜히 자랑스러웠다. 그 양념장은 그 원조 떡볶이집 주인과 나만 아는 비밀이 된 것이다. 어느 집이 원조인지 지금은 대부분 알고 있지만 그건 전해 들은 것이고 원조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정보의 질과 비밀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에 들어서면 지금은 양쪽으로 잘 꾸며진 떡볶이집들이 여러 개 있다. 저마다 자기들이 '원조인 척'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느 떡볶이집이 원조인지를 잘 알고 있는 내가 무덤까지 그 비밀을 가지고 가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 원조 떡볶이집의 허름한 옛날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번듯한 매장이 널찍하게 차려져 있다.
공간은 변하였고 장소는 사라졌다.
일상에서 탈출하여 숨을 수 있다면 그 곳이 나의 Hot place가 되는 것이다.
중학생 때 잠실의 아파트 상가에 있는 '로라장'에 자주 갔다. 롤러 스케이트장을 말하는 거다. 스케이트를 잘 타지는 못했지만 그 곳에 가면 일상에서는 맛보지 못하는 짜릿함이 있었다. 로라장까지 들어가는 설렘, 약간 어두우면서도 현란한 조명이 날아다니는 화려함, 관자놀이가 쉬지 못하고 계속 뛰게 만드는 강렬한 비트, 주름치마에 야한 화장까지 곁들인 연예인 같은 누나들의 환호성. 모두 나의 일상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평소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착하기만 했던 내 친구 민기도 그 로라장에만 가면 그 누나들과 함께 어둑한 구석에서 담배연기를 내뿜곤 했다. 민기는 얼굴이 너무 잘 생겨서 로라장에만 가면 누나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민기는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전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히 공부에 전념했다. 나도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신하게 지냈다.
답답할 때 탈출해서 숨을 수 있던 그 공간이 나의 소중한 장소였던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지금은 아무도 롤러 스케이트, 일명 '로라'를 타지 않는다. 그 로라장도 없어진 지 오래 되었다.
공간은 사라졌고 장소도 사라졌다.
‘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 여기는 사직동이지만, 나의 사직동은 아닙니다. 나의 사직동은 이제는 없습니다.’
태어나고 자란 사직동이 재개발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이웃끼리 서로 돕고 이야기하고 웃고 아파하면서 함께한 골목은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리고 깔끔하고 반듯하고, 그래서 비인간적인 동네로 변했다. 새 아파트가 들어섰고 옛날의 정겨운 사람들은 흩어졌다.
작가는 '당신이 있어야 할 장소는 어디입니까?'라고 묻는다. 책을 읽고 나면 그런 소리가 들린다.
한성옥 · 김서정, 《나의 사직동》
넌 지금 어디 있니?
고등학생 때 수학이 너무 어려워서 수학을 포기했다. 그 당시에는 수학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줄 알았다. 좀 더 살아보니 수학보다 더 어려운 게 있다. 인간 관계다. 인간 관계엔 답이 전혀 안 보이는 게 너무 많다. 인간 관계에서 자꾸 실패를 하다 보니 Hot place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Hot place는 사람이 사람과 어울려야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결국 골방으로 들어가게 된다. 모바일 게임, SNS, 텔레비전이나 유튜브, 좀 움직인다면 PC방 같은 골방으로 자꾸 들어간다. '사람'이 배제된 공간으로 숨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SNS는 사람과 소통하는 확률이 더 높긴 하지만, 대부분의 SNS에는 잘 입고 잘 먹고 잘 노는, 이른바 '잘 나가는' 사진들만 올라와 있다. 무릎 나온 잠옷 바지나 식어버린 라면 국물이나 뒹굴다 지친 방콕 사진은 아무도 올리지 않는다.
가상의 공간에서는 가식의 관계로 서로가 이어질 뿐 추억의 장소, 비밀의 장소, 탈출의 장소인 Hot place는 찾아보기 어렵다. Hot place를 만들려면 시간과 돈을 좀 들여서 만나야 하는 법인데, 아쉽다.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 상실』, 25쪽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의 말대로라면 난 너무나 인간답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그나마 유지되는 관계도 보여주고 싶은 면만 보여주게 되니 파편화 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결국 그들과 내가 만날 수 있는 Hot place는 점차 사라지는 것 같다.
왜 오늘의 나는 내가 기억하는 지난 날들의 나보다 아름답지 않은가. 지난 날들의 아픈 기억은 잊어버렸고 아름다운 기억만 남아 있기 때문인가. 지난 날들의 아름다운 기억보다 더 아름다운 곳에 내가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