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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Mar 03. 2019

Deus ex machina

아나톨

우리 나라가 일본과 축구경기를 하고 있다. 우리 나라가 0 대 1로 지고 있고 후반전 43분의 상황이다. '제발 한 골만!' 하면서 숨죽이며 경기를 보고 있다. 갑자기 경기장 중간 하늘에서 와이어에 매달린 신이 내려와서 경기장에 굴러다니던 공을 낚아채더니 다시 날아서 일본 골문으로 가 공을 골문에 집어넣었다. 관객들은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하고 잠시 머뭇거렸지만 주심이 골인으로 인정하고,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어쩔수없이 꾹 참고 후반 44분 1 대 1의 상황을 또 조마조마하면서 보고 있다. 이때 다시 와이어에 매달린 신이 내려와서 공을 낚아채서 일본 골문에 집어넣어서 우리 나라가 일본을 2 대 1로 이기고 경기는 끝이 났다. 우리 나라가 이겨서 좋긴 하지만, 이런 식의 승부를 보려고 경기장을 찾은 건 아닌데, 아무도 찝찝한 관중을 달래주지 않는다.

    

라틴어 Deus ex machina(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영어로 god from the machine이라고 번역하고 우리말로는 '기계에서 내려온 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말은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려는 장치'를 말하는데 고대 그리스극에서 실제의 기계장치가 쓰였다고 한다. 현대의 어떤 드라마에서 만약 이 장치(드라마 작법이나 연출법)가 쓰였다면 그건 작가가 드라마 원고를 서둘러 써야 할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선 깔고 미리 암시하고 앞뒤가 잘 맞아 떨어지게 이야기를 짜낼 만큼의 시간이나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리스 드라마에서는 무대 위의 인물 간에 갈등이 심해졌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크레인 같은 기계에 초자연적인 존재를 매달아 내려서 무대 위의 복잡한 상황을 한 방에 해결하곤 했다.('The Greek device of settling problems by letting a supernatural being descend onto the stage.')

G. B. Tennyson, 『An introduction to drama』, 19쪽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이러한 상황이 무려 스무 번 정도 나온다. 『일리아스』에는 요즘 유행하는 모바일 게임 방식인 MMO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처럼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이 창, 칼, 화살은 물론 돌까지 던지고 휘두르고 찌르며 격렬한 전투를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격렬한 그 전투의 현장에 신들이 심심치 않게 지상으로 내려와 전투에 개입한다.

예를 들면, 메넬라오스가 파리스의 투구 끈을 잡고 질질 끌고 갈 때 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투구의 끈을 끊어 버린다. 메넬라오스와 파리스는 각각 상대국의 장군이다. 신 덕분에 파리스가 기사회생한 것이다. 그러자 메넬라오스는 투구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파리스에게 달려든다. 파리스에겐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다. 다시 신이 내려와서 짙은 안개를 치고 파리스를 낚아채서 안전한 곳으로 옮긴다.

정확하게 날아오는 화살의 진로를 바꿔서 엉뚱한 곳으로 화살이 날아가게 한다든지,(영화 <매트릭스>에서 총알 피하는 장면만큼 황당하다!) 반대로, 안 맞을 화살도 방향을 바꿔서 적군에게 맞게 한다든지, 갑자기 밤이 되게 하여 적의 공격을 차단하는 것도 전쟁터에 일부러 내려온 신들이 하는 일이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식음을 전폐한 아킬레우스에게 나타나 음식을 갖다준 이도 신이다.


'Deus ex machina'는 『일리아스』 같은 작품을 드라마로 공연할 때 무대 위에서 크레인에 신이 매달려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스뿐 아니라 로마의 드라마에도 전파되어 사용되었다. 맨 처음 그리스나 로마의 무대에서 갑자기 크레인에 달린 신 같은 존재가 스르륵 내려올 때 관객들은 너무 놀라서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을 세 번, 네 번 계속 써먹다 보면 관객들은 복잡한 문제가 펼쳐지는 긴박한 상황이 되면 '또 크레인이 나타나겠군.' 하면서 식어버린 고구마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집에 갈 준비를 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김이 빠지는 거다.  

로마의 콜로세움에서도 드라마를 상연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있었던 진부한 방식이 의외로 21세기인 요즘도 자주 사용된다. 작가는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만 사용하고 미련 없이 버렸어야 할 방식들이다. 현대의 드라마에는 크레인에 신이 매달려 내려오지는 않지만 '초자연적인 힘이 갑자기 나타나 꼬인 상황을 풀어준다.'는 면에서는 그리스와 로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주인공이 어딘가 위험한 장소에 가면 그를 도울 사람도 거기에 간다. 약속도 안 했는데. 백 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또 그 조력자를 만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느 날 볼 일이 있어 시청에 간다. 그런데 나는 꼭 필요한 서류를 한 개 빠트리고 말았다. 민원실 앞에서 멘붕에 빠져 있는데 마치 그 날을 위해 10년 전부터 준비라도 한 것처럼 나를 도와주려는 내 지인이 민원실 안에서 나온다. 그는 다른 일로 시청에 온 것인데 마침 나에게 필요한 서류를 그가 가지고 있다. 아! 세상에 이런 우연이, 그것도 수억 번의 이유가 겹쳐져야 해결될 만한 기막힌 우연의 연속이 도대체 현실에서 가능한 것인가? 더군다나 그는 자기 거주지의 시청도 아닌데 거기까지 왔다니.    

이런 경우도 있다. 주인공이 연약한 여자이고 그녀가 악당들로부터 쫓기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이때 어디선가 그녀를 돕는 어떤 남자가 나타난다. 그 남자는 악당들을 깔끔하게 무찌르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악당들은 서너 명이거나 혹은 열 명이 넘는 경우도 있는데, 여자를 구해준 남자는 뺨만 약간 긁힌 정도의 가벼운 상처만 을 뿐이고 악당들은 모두 바닥에서 뒹굴거나 실신다. 그런데 그 남자 주인공이 이 여자를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며칠 전 철에서 여자가 소매치기 당할 뻔 한 걸 발견하고서 여자의 가방을 지켜준 적이 있다.

우리 인생에서 같은 사람을 비슷한 상황으로 두 번 이상 마주칠 가능성이 억만 분의 일이라도 있나. 식구도 아닌데. 그런데 이상하다. 드라마를 엮어가려다 보니 우연히 만났던 사람은 나중에 또 우연히 만난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절묘한 타이밍으로.      


드라마에선 지겨울 정도로 자주 나타나는 'Deus ex machina'는 정작 내 치열한 인생의 현장에서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기분이 좋아서 5천 원이나 주고 산 로또는 단 한 장도 맞지 않는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약 10년 동안 매주 10장씩 똑같은 번호만 찍었다는데 아직 당첨 소식이 없다.


아나톨은 아내와 여섯 마리 자녀들을 먹여 살리는 성실한 남편이자 아빠 쥐다. 남긴 음식을 밤마다 열심히 찾아 다니던 아나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쥐들은 끔찍하고 더럽고 무례하고, 심지어 모두 악마들이니 없애버려야 한다는 얘기였다. 성실히 살아온 자존심과 명예에 심한 상처를 입은 아나톨은 자기들을 그렇게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치즈공장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여러 종류의 치즈 맛을 본 후 치즈 위에 '최고로 맛있음', '매우 맛있음', '맛있음', '별로 맛없음', '진짜 맛없음' 같은 라벨과 맛 개선 방법을 붙여놓는다. 세상에서 치즈 맛을 가장 잘 아는 건 쥐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다. 아침에 치즈 위의 라벨을 발견한 치즈공장 사장은 아나톨의 조언대로 치즈 맛을 개선시켰고, 그 결과 치즈 맛과 인기가 좋아져서 아주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공개하지 않은 아나톨에게 치즈공장 사장은 감사의 표시로 치즈를 맘껏 먹으라는 편지를 남겼다. 아나톨의 식량 주머니는 물론 자부심과 행복감이 더 커진 건 당연히 따라 온 축복이 되었다.       

 

결국 성실이 성공보다 더 값진 행복이라는 교훈을 또 안겨주는 이야기다. 모든 성공한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지만 모든 성실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은 아니라는 현실은 견디기 힘든 시련이다. 성실히 살려고 애쓰면서도 'Deus ex machina'를 간절히, 너무나 간절히 바라는 나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인가.


극한의 불행이 없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착한 결론에 몇 살쯤 되면 순응할 수 있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아나톨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묵묵히 하는 것이 성실이고 그것이 곧 성공이라는 것을.


아! 그래도 한 번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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