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된다는 그런 말이 있듯이 우리의 집중을 자꾸 이렇게 분산시키려는 일들이 항상 있을 거다. 으레, 그게 무슨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될 것은 이것이다, 하는 것을 정신을 차리고 나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걸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셔야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 트라우마나 이런 여러 가지는 그런 진상 규명이 확실하게 되고 그것에 대해서 책임이 소재가 이렇게 돼서 그것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투명하게 처리가 된다, 그런 데서부터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뭔가 상처를 위로받을 수 있다, 그것은 제가 분명히 알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이다. 몇 년 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도무지 못 알아듣겠다고 엄살을 부렸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어려운 이론이나 복잡한 주장을 말하지는 않았다. 단지, 좀 아쉬운 것은 세 가지 정도 있는데,
1.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 같은 것들이 호응이 안 되거나 서로 위치가 바뀌는 경우가 좀 있었다.
2. '그런, 어떤, 그러니까, 이런, 이렇게'같이 다른 상황이나 사물을 지시하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는데, 그러면서도 정작 이 단어들이 지시해야 할 대상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3. 마침표 찍을 타이밍을 이따금 놓쳐서 문장 길이가 좀 긴 편이었다.
이런 정도의 cliché(클리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진부하긴 하지만 평범한 습관들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P와 K와 C의 cliché도 진부하지만 아주 평범한 것들이다.
P는 문장과 문장의 틈새를 욕으로 메운다. 그의 욕은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K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가만 있어봐라." 그의 의견을 계속 존중해주기는 어렵다.
C는 "정말?"이라는 말을 정말 많이 한다. 내 말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자꾸 고민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cliché를 남발하면서 말한다. 자신이 cliché를 남발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면서 cliché를 남발하기도 한다.
cliché는 판을 뜬 후 똑같이 여러 개를 복사해내는 것을 말한다. 똑같이 복사하다 보니 계속 똑같은 모양만 산출되고 결국 진부한 습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진부란 썩은 것을 덮지도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작가나 감독의 의도가 어쨌든, 영화나 드라마에서 cliché는 너무나도 자주 쓰인다. 안타깝게도 cliché는 시청자의 몰입을 막고 끝내 불안으로 몰고간다.
주인공은 위험한 곳에 문제를 해결하러 혼자 가게 되는데 마침 핸드폰을 안 들고 가서 동료들이 연락할 방법이 없게 된다. 평소엔 꼭 들고 다니더니 왜 그 중요한 순간에는 안 들고 가는지 모르겠다.
악당이나 범인 잡으러 어떤 음습하고 허름한 곳에 들어가면 꼭 전등을 켜지 않고 어두운 곳을 더듬거린다. 이미 정전이 된 경우도 있지만 정전이 아니어도 전등 따위는 켜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일한 게 얼마나 됐지?'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잠시 후에 죽는다. 함께 일한 게 얼마나 되었는지 몹시 궁금한 채로 죽게 되는데도 그들이 함께 일한 게 얼마나 됐는지 끝내 안 가르쳐준다.
화가 잔뜩 나서 담배를 피우려고 담뱃갑을 꺼내면 그 담뱃갑은 비어 있어서 연기자는 화가 더 솟구치고, 그 빈 담뱃갑을 사정없이 구겨서 던져버린다. 담배 피우는 모든 사람은 한두 개비 정도 남았을 때 새 담배를 미리 사놓는다. 설령 담배를 미리 사놓지 않더라도 빈 담뱃갑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는 않는다.
'나 대한민국 검사야.'라고 말하는 검사는 모두 자신의 국적이 대한민국임을 굳이 강조한다. '나 대한민국 요리사야.' '나 대한민국 택시드라이버야.' '나 대한민국 미용사야.'라고 말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심각하게 설전을 벌인 후 먼저 자리를 뜰 때는 상대방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툭 친 후 멀어져 간다. 비켜 갈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데도 꼭 그런다. 어깨를 치고 간 사람은 두세 걸음 걸은 후 뒤돌아보며 "아! 그거 알아?" 같은 질문을 한다. 등 뒤에서 중요한 질문을 하는데도 어깨를 맞은 사람은 여전히 얼음이 된 채 서 있다.
주인공이 바닥에 떨어뜨린 것의 맨 마지막 물건은 꼭 '썸녀'나 '썸남'이 주워주려 하다가 손이 겹친다. 누군가 다가오고 남의 손까지 내 앞으로 들어오면 최소한 멈칫할 일이지 겹칠 일인가?
악당들은 쓰러진 주인공을 바로 죽이지 않고 어쩌구저쩌구 떠들다가 쓰러진 주인공의 동료한테 총을 맞는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긴박한 순간에 빨리 쏘고 튀어야 할 악당은 왜 장황하게 주절거리다 뒤통수를 맞는지 모르겠다.
응급환자는 침대에 누운 채 긴 복도를 지나야 응급실에 도착한다. 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형광등은 가물거리고 그의 연인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모든 병원은 주차장에서 문만 열면 응급실이 최대한 빠르게 연결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긴 복도를 하염없이 굴러가지 않아도 되는데 침대는 왜 그리도 오래 굴러가는지 모르겠다.
진부하다.
cliché는 진부이고, 진부의 원인은 나태다. 나태는 타인과의 관계에 무심한 것이다. 나의 이익이나 과업만 성취하려다 보니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못하는 것이다. 나태 위에서 진부가 자라나고 진부는 불안으로 이어진다는 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진부하지 않으려면 좀 더 민첩하고 치밀해야 한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다른 사람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106쪽
‘그게(유대인 학살) 정말로 새로운 유형의 범죄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단서를 달고 싶어요. 우리는 어떤 범죄자를 떠올릴 때 범행 동기가 있는 사람을 상상해요. 그런데 아이히만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무 범행 동기가 없었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행 동기라고 이해할 만한 게 없었다는 거죠.'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76쪽
아이히만은 2차 대전 때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앞장선 공무원이었다. 그에게 유대인 학살은 일상적인 업무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것이 엄청난 범죄라는 사실을 끝내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나태했다.
어느 날 무심코 던진 거짓말이 아주 작은 빨간 점이 된다. 그 점은 점점 커지고 많아지더니 사람의 마음과 일상을 잠식해버린다. 처음엔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책의 모든 화면을 다 채워버린다. 그의 마음까지 덮어버린다. 그리고 계속 따라다닌다. 그림책 《거짓말》의 내용이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화면 구석에서 아주 작은 빨간 점 하나가 나타나더니 그 점이 매일 조금씩 커져서 화면 전체를 덮어버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 점이 바로 진부인데 진부는 자기가 태어난 태반 같은 나태를 먹으면서 자라난다. 진부는 불안으로 자라나서 영혼까지 잠식해버린다.
그리고 다시 나태해진다.
언제쯤 나태를 벗어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진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