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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Feb 21. 2019

내 친구, 소시민 정수의 권력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라는 책의 첫 페이지에 이런 글이 있다.

'집을 잃어버린 모든 멧돼지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 되도록 살아남아 이왕이면 행복해지고 싶은 이 땅의 모든 종족들에게 유용한 지침서가 되기를!'

      

도로를 새로 만들기 위해 산을 깎고 허무는 바람에 집을 잃어버린 멧돼지들이 도시로 내려온다. 그 멧돼지들은 도시를 헤집고 다니다가 힘들면 트럭 짐칸에 무임승차하여 목적지까지 손쉽게 이동한다. 도살장으로 실려가는 수십 마리의 다른 돼지들을 보면서 그들보다는 심각한 상황이 아닌 것에 감사하기도 한다. 건물 뒤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통을 마구 뒤져서 충분한 영양 섭취를 해둔다. 뷔페 창문 밖에서 기웃거려 보지만 그 안까지 들어가는 것은 너무 무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쉽지만 포기한다. 신기하다고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이내 경찰들이 곤봉을 들고 떼로 쫓아오는 걸 피해서 달아난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 살기 좋은 새 집을 마련해야 한다. 조용하고 깨끗한 어느 아파트의 집 한 곳을 무단 침입하여 탈취한다. 기존의 집주인은 멧돼지들에게 쫓겨 혼비백산 도망간다. 집을 탈취한 멧돼지들은 친구들을 불러 집들이라도 할까 생각 중이다.     


인간은 자연과 공간을 나누어 써야 하는, 자연의 한 구성원일 뿐인데 임의로 공간을 차지하면서 자연 속의 다른 구성원들의 공간을 빼앗는 경우가 많다. 만약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면서까지 공간을 임의로 점유하는 일이 계된다면 멧돼지를 포함한 자연의 다른 구성원들이 살 곳이 없어서 인간이 사는 곳으로 쳐들어와 인간의 공간을 도로 빼앗는 날이 올 것이고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텔레비전의 어떤 프로그램에서 본 얘기다. 사람 A는 자신의 반려견 B에게 악수를 하자며 "손, 손!" 이라고 말한다. B견에게 손(실제로는 앞발)을 내밀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B견은 '개무시'를 한다. A남이 다시 "손, 손!"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볼륨도 커지지만 간절함이 묻어 있는 요청으로 변한다. 명령에서 요청으로. 그래도 B견은 역시 개무시. A남은 더욱 간절하게 "제발 손, 손, 한 번만!"이라고 말하며 B견의 눈높이까지 자신의 온몸을 숙인다. B견은, A남이 손으로 굳게 믿고 있는 앞발을 내민다. A남이 그토록 간청했던 앞발을. 그런데 그건 누가 봐도 우연이다. 어쩌면 B견은 그냥 자리를 옮기려고 앞발을 들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A남은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B견의 앞발을 덥석 잡은 후 "어우! 내 새끼!"하면서 와락 껴안는다. A남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그냥 우연히 앞발을 들었을 뿐인데 주인 A남의 진한 포옹이 들어오자 B견은 적잖이 당황한다. 하지만 그 갑작스럽고 격한 포옹을 거부하기에는 A남의 감동이 너무 눈물겹다.  


개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다. 어떤 똑똑한(?) 개는 사람의 말을 이삼십 개까지 알아듣기도 한다지만 대부분의 개는 다섯 개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한다. 앉아, 일어서, 기다려, 먹어, 가자 정도. 자주 사용하는 '안 돼.'라는 말은 구체적인 행동을 직접 지시하는 것이 아니므로 '말을 알아듣는다.'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다. 개와 사람의 언어에는 공통된 알고리즘이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개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게 아니고, 훈련 등을 통한 조건반사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했단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더 빌리자면, '현존재'인 사람 그 분자구조 자체가 원천적으로 다른 '존재자'인 개는 각기 존재의 모양과 방식이 다르므로 서로 같은 '존재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 사람은 '현존재', 개는 '존재자'라고 한단다. 전혀 다른 존재라는 뜻이다. 각각의 '존재의 집' 벽이 막혀 있으므로 통과할 수도, 손을 맞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서로 말을 알아듣고 손을 맞잡으려면 A남과 B견 중 한 명, 혹은 한 마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존재의 집' 문을 열고 나와서 상대방의 '존재의 집'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이 개가 되든지, 개가 사람이 되든지.

                 

그런데 주인 A남은 자신의 말을 B견이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여 감동에 또 감동을 한다. B견은 '뭘 그렇게까지 감동하기는 ···.'이라고 말하는 듯 눈만 껌뻑거린다. 인간에게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웃픈 이야기이다. 소통이 안 된다는 건 '존재의 집'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정상적인 언어로 말하는데 같은 분자구조를 가진 '사람'이라는 개체끼리 소통이 안 된다, 같은 개체이면서도 '존재의 집'이라는 '공간'이 다르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에 나오는 멧돼지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 특히 멧돼지는 자신의 저돌적인 행동이 사람에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오히려 멧돼지는 자신이 굉장히 지혜롭다고 착각을 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생각을 하도록 국민들을 길들였다. 설령 권력자와 피지배자가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권력을 가진 자와 피지배자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권력자는 자신들이 피지배자와 항상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달콤한 말로 피지배자를 설득하려 한다.


로마제국은 전차 경주나 검투사의 혈투를 국민의 오락거리로 삼아 권력을 유지했다. 무솔리니나 히틀러 같은 파시스트가 예술이나 체육 활동을 권력 유지의 한 방편으로 사용한 것도 그런 것이다. 무솔리니가 베니스 영화제를 정권 유지에 이용한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우리나라에는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군사정권이 프로야구를 권력 유지의 도구로 사용하려 했다. '국풍 81'이라는 축제도 잠깐 있었다. 1980년에 있었던 광주 민주화운동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그 다음 해에 마련한 관 주도의 축제였다.      

예술이나 체육이 인간의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하고 생활의 발전을 이룬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민중의 것이었어야 했는데 어울리지 않게 권력자의 도구가 된 적이 자주 있다. 권력은 처음부터 민중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 권력을 위임받아 시행(serve)하던 공무원들이 공급자(server), 혹은 종(servant)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행태가 인간의 세상에 계속 이어져 왔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쭉.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만난 베니스 산 마르코 광장

그런데 우리 나라의 민중은 참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 방법은 탈춤이다. 탈춤은 '굿'에서 유래되었다. 처음엔 제의적(offering)인 성격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놀이(play)'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그래서 탈춤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추는' 것이라기보다는 본인을 위해 '노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탈춤을 춘다.'라고 하지 않고 '탈춤을 논다.'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냥 노는 게 아니라 '풍자(satire)를 위한 웃음(farce)'을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얼굴에 탈(가면)을 쓴다는 건 참 신기한 경험이다. 탈을 쓰고 나니 용기가 생긴다. 그래서 탈 속에 얼굴을 가리고 권력자를 한 번 실컷 욕을 해 봤더니 욕을 한 본인도 시원하고 그 욕을 들은 관객들도 후련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탈만 썼다 하면 부패하고 이기적인 권력자들을 향해 날카롭고 묵직한 욕지거리 한 방씩 날려주는 게 유행이 된 것이다. 그래도 권력자들의 보복이 조금 무섭긴 했기 때문에 대낮보다는 깊은 밤에 탈춤을 놀았다.      

탈은 그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눈두덩, 입술, 콧대가 과장되게 튀어 나오고 이마나 볼에도 주름이 있다. 캄캄한 밤에 모닥불과 횃불을 피워 놓고 탈을 덮어쓰면 불빛에 비추인 탈 표면의 굴곡이 연기자를 더욱 기괴하게 보이게 한다. 권력자들에게 겁을 주기 위한 방법이다. 세상 두려울 게 없으니 대사가 걸쭉해지고 과감해진다. 한바탕 소리 지르고 노래하고 춤추고 웃고 나면 새벽 안개가 피어난다. 그러면 연기자와 관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질펀했던 마당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조선시대에 그랬단다.   

   

'농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탈춤은 양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양반을 공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불만의 통로나 공격은 일상생활에서와는 달리 농민이 우월한 입장에서 진행되며, 양반은 마치 재판이라도 받는 것처럼 취급된다. 이런 의미에서 탈춤은 일종의 연극적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조동일, 『탈춤의 역사와 원리』, 72쪽     


탈춤이 '굿'에서 '연극'으로 변모되면서 권력자에 대한 풍자가 신랄해진 것은 18세기쯤이다. 조선 중기쯤이다. 그 풍자의 명맥은 약 200년 정도를 이어오다가 유신정권, 군사정권, 외환위기, 경제공황의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꾸준히 민중의 마음 속에 강물처럼 흘러왔다. 2018년 5월, 한진그룹 갑질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가이포크스 가면을 쓴 채 시위를 한 것도 탈춤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조선시대의 탈춤 같은 연극적인 탈춤은 점점 더 기대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인터넷의 왕성한 발전과 개인주의의 팽배로 풍자의 공간은 물리적 공간이 아닌 웹(web) 상의 공간으로 그 주요 무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전혀 새로운 공간, 컴퓨터 모니터나 휴대전화 화면이 권력의 전쟁터가 이미 된 것이다.

21세기에는 댓글을 쓰거나 온라인 청원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행위들도 권력에 영향을 미치는 방향타가 될 수는 있겠지만, 조시대 때 흠뻑 젖은 탈을 벗으며 시원한 새벽 바람을 느낄 때의 쾌감만 같을까 싶다. 조시대 민중은 참 멋이 있었던 것 같다.          


'민주주의의 수호는 자신의 정치적 관심을(그런 게 있기나 한다면 말이다.) 온라인 청원을 통해 표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터넷 상에서 거대한 격분의 물결은 사회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런 식의 항의로 정치적, 또는 사회적 변화가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브룬힐데 폼젤, 『어느 독일인의 삶』, 274쪽   

  

현실은 외면하고 의무는 이행하지 않으면서 부정부패나 이기주의 같은 것들에 대항하는 행위를 인터넷 속에 하는 세태를 경계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쾌락적 소비 지상주의의 만족을 위해 '대항'이라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브룬힐데 폼젤나치 선전부 속기사였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결과적으로 나치를 이롭게 한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던 연약한 여자였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자기가 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누구를 이롭게 하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버린다고 경고한다. 그는 정신을 차리라는 뜻으로 한 마디를 덧붙인다.

     

'젊은 세대의 상당수에게는 일상적 생활의 중심지에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중요하다. 그에 대한 완벽한 무대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같은 플랫폼을 가진 인터넷이 제공한다. 이것들은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과 자기 도취적 연출의 허기를 달래준다.'

브룬힐데 폼젤, 『어느 독일인의 삶』, 272쪽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저항의 탈을 주구장창 써야 할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해야 할 권력이 몇몇 인간만 행복하게 하는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라. 이건 우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소련의 압제를 민중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 자신을 불사른 체코의 청년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의 추모비


올림픽대로를 달리다가 밖으로 나가는 램프 중에서 상습적으로 정체되는 구간이 몇 군데 있다. 평균 네 개의 차로가 한 개의 차로로 바뀌면서 병목현상으로 많은 차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설 수밖에 없다. 어떤 램프는 무려 2km 정도를 줄을 서서 찔끔찔끔 달리느라 20분 이상을 가다서다 한다. 이럴 때 가장 짜증나는 게 새치기로 들어오는 차다.

정말 길을 몰랐다가 뒤늦게 깨닫고 우물쭈물 끼어드는 순진한 미어캣과 길을 알면서도 자기만 빨리 가려고 얌체처럼 끼어드는 다람쥐는 사이드 미러에 비친 그 차의 표정(?)에서 차이가 확 난다. 앞 차와의 간격을 최소한으로 좁혀서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더라도 끼어들려고 마음먹은 다람쥐를 막기는 어렵다. 그들은 결국 끼어든다. 나는 착실하게 줄을 서서 기어왔는데. 정말 열 받는다. 나의 노력이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느낌이다. 그 다람쥐가 바로 내 앞에서 끼어들기라도 하면 계기판의 온도 게이지도 함께 상승한다.      


내 친구 정수는, 비록 어묵만 먹고 왔다지만 촛불집회에도 딱 한 번 참석해본 아주 평범한 소시민이다. 그는, 차로 변경이 금지되어 있는 램프 출구의 끝부분 실선 구간에서 앞 차와의 간격을 살짝 벌려준다. 그러면 여지없이 다람쥐들이 끼어든다. 보통 실선 구간이 200미터 정도 되는데, 그 구간에서 끼어드는 두세 마리의 다람쥐들을 블랙박스로 포착한다. 집에 돌아오면 촬영된 메모리카드를 빼서 경찰청의 '목격자를 찾습니다.'에 영상으로 신고한다. 신고 포상금 같은 건 없다.

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상상만 해도 굉장히 번거로운 작업일 거라는 게 짐작이 간다. 그런데 그는 이 과업을 위해 메모리카드 두 개를 번갈아 꼈다뺐다 한단다.


대부분의 권력은 공간을 크게 차지한다. 부당한 권력일수록 점유하는 공간은 지나치게 커진다. 큰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새치기 같은 작은 범법부터 수만 명을 학살하는 탈법까지 자행한다. 부당하게 빼앗긴 공간을 회복하는 것이 선한 권력을 세우는 것이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내 친구, 소시민 정수의 노력에 기립박수를 보낸다. 아주 조금만 과장하자면, 그는 독립운동에 버금가는 정의 구현의 사제(priest)다. 선한 권력은 지지하고 부패한 권력은 응징하는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친구, 소시민 정수의 선한 권력이 번성하기를.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이런 지적을 했다.

'인간은 권력을 획득하는 데는 매우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그리 능하지 못하다.'


사족 : 그도 점점 늙어가는데, 돈도 안 되고 번거롭기만 한  소박한 권력아직도 이어가고 있는지 다음 달에 만나면 물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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