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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Apr 22. 2019

쓸 데

떨어질 수 없어

<미스터 션샤인> 2018년에 상영된 TV 드라마다. 시간적 배경은 대한제국시대다. 친일파 아버지의 도움으로 젊은 나이에 호텔 주인이 된 이양화는 자기 호텔을 찾아온 양반집 딸 고애신에게 커피를 대접한다. 초심자는 달콤한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며 한 잔 그윽하게 따라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커피 한 모금을 마신 고애신은 찻잔을 내려 놓으며 찡그린 얼굴로 말한다.

고애신 : 이 쓴 걸 왜 마시는 거요?

이양화 : 처음에 쓴 맛만 나던 것이 어느 순간, 시고 고소하고 달콤해지지요. 심장을 뛰게 하고 잠 못 들게 하고, 무엇보다 아주 비싸답니다. 마치 헛된 희망 같달까요!

고애신 : 그럼 귀하는 헛된 희망을 파는 거요? 그것도 비싸게.

이양화 : 헛될수록 비싸고 달콤하지요. 그 찰나의 희망에 사람들은 돈을 많이 쓴답니다.  

    

과시를 하려면 쓸데없는 데 돈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생활필수품에 돈을 써서는 과시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두루마리 휴지를 동창회에 들고 간다고 해도 아무런 과시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 이유로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귀금속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과시가 되는 것이다. 씹어 먹을 수도 없는 다이아몬드에 수천만 원, 수억 원을 쓴다는 이야기는 돈이 차고 넘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현준, 『어디서 살 것인가』, 178쪽     


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팔을 슬쩍 높이 올려 에르메스 백을 들었을 때 설령 그 백 속에 아무것도 안 들었다 하더라도, 동창회에 나가려면 적어도 에르메스 백을 들어줘야 한다는 뜻이다. 그 정도는 해줘야 '시'의 본래 의미를 살린다는 것이다.     


과시를 하려는 의도도 없는데 '쓸데없는' 짓을 한 경우도 있다. 작게는 1Kg짜리 덤벨부터 크게는 자전거까지, 구석구석 쳐박혀 있는 운동기구들이 한 트럭이다. 트레드밀은 빨래건조대로 쓰기엔 차지하는 공간 대비 효율이 너무 떨어져서 돈까지 내고 버다.

굳이 운동할 필요가 없는 몸짱들이 홈쇼핑 방송에서 즐겁게 운동하길래 몇  샀는데 그게 우리 집에 오더니 서로 즐겁지 않게 되었다. 내 몸매가 참 '쓸데없는' 라인이라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꾸역꾸역 질러서 쌓아놓은 결과물들이 참담하다. '쓸데없는' 육체의 소유자라는 걸 깨달으면서도 '쓸데없는' 제품을 구매하는 '쓸데없는' 짓을 계속 반복하는 개미지옥 같은 광고의 힘에 진작 무릎을 꿇었다. 그 몸짱들은 처음부터 그 '쓸데없는' 기구를 이용해서 몸짱이 된 것이 아닌 게 거의 확실하다.


결혼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던 결혼 5년차쯤에 아내의 생일 선물로 고데기를 선물한 적이 있다. 바쁜 아침에 전기만 꽂은 후 집게처럼 생긴 고데기를 머리카락 속에 집어넣어 지그시 눌러 내리면 저절로 머리카락이 정돈되는 아주 실용적인 신문물이었다. 이 정도면 아내의 생일 선물로 가성비도 최고, 만족도도 최고일 것이고, 적어도 다음 해 생일 때까지 1년 동안 두고두고 칭찬과 감사의 표시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무척 기대했었다.

그런데 망했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생일에 주는 선물은 '용'보다는 '성'이 더 필요하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사실은 지금도 절실하게 깨닫고 있지는 못하다.) '성'이라는 말은 '쓸 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쓸 데가 있어야 정성이 있는 것이고 쓸 데가 없으면 정성이 없다는 식의 통상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아내는 사치스럽거나 허례에 얽매이는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생일만큼은 '실용'보다는 '정성'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 비록 꽃병에 며칠 꽂혀 있다가 시들어서 버려지더라도 울긋불긋한 꽃을 주었어야 했다. 끝까지 다 먹지도 못하고 버려질 게 뻔하지만 데코가 예쁜 케이크를 곁들였어야 했다.

      

'쓸데없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어려운 상황이 벌어진다. 라이언 일병 한 사람을 본국으로 송환시키라는 특명을 받은 송환 분대원이 전쟁터에 투입된다.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산 넘고 물 건너 라이언 일병을 찾아간다. 라이언 일병은 안전하게 본국으로 송환되지만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죽는다.

영화 <마션>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그려진다. 화성에 혼자 남겨진 마크를 구하기 위해 지구로 귀환 중이던 우주 탐사선의 방향을 돌린다. 지구를 반환점으로 삼아 유턴을 하는 것이다. 자칫 실수하면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 소요되는 시간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수백 일이나 걸리는 일이다. 그에 따른 금전적인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소모된다. 결국 그 모든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마크 한 사람을 구해낸다.

사람의 생명은 무엇보다 귀하니까 비용이 많이 들어가도 꼭 구해야 하겠지만,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다른 여러 사람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과연 '쓸데없는' 것인지, '쓸 데가 있는' 것인지는 판단하기가 참 어렵다.


성경 마태복음에 보면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라는 예화가 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아흔아홉 마리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가 있는 양이고, 그래서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정도로 뜻을 새기면 되는 예수님의 비유였다. 어렸을 때 교회에서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몹시 불편했다. 아흔아홉 마리의 생사가 궁금했다. 산에 그냥 두었으니 분명 그 녀석들 오합지졸 흩어져서 다치고 죽고 도망가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 후로도 여러 번 이 예화를 들을 수 있었지만 목사님도, 선생님도 아흔아홉 마리의 생사에 대해서는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산에 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 질문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 아흔아홉 마리의 생사가 아직도 궁금하다. 만약 내가 양치기였다면 일단 아흔아홉 마리를 안전한 우리 안으로 들여보낸 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러 갔을까. 만약 그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내 자식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한편으로는, 내가 아흔아홉 마리 양 중의 한 마리였다면 개인 행동을 한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엄청 원망했을 것이다. 양치기이든, 길 잃은 양이든, 아흔아홉 마리 양이든 각자의 위치에서 취해야 할 원칙이 필요한 것 같다.

양치기나 길 잃은 한 마리 양은 주인공이고, 길 잃은 양도 결국엔 안전하게 구출되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겠지만, 조연 역할을 했던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생사는 어떻게 결론이 나야 모두가 웃을 수 있을까. 그들의 '쓸 데'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건 변질된 선민의식 같은 거 아닐까.     

쓸 데 있는, 쓸 데 없는

소녀가 너무나 좋아하던 신발이 있었다. 24시간 내내 소녀와 함께하던 신발이었는데 한 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뜯기는 바람에 두 짝 다 쓸 데가 없어졌다. 뜯긴 한 짝은 수선이 불가능해서 멀쩡한 다른 짝까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쓰레기 하치장까지는 두 짝이 함께 있었지만, 망가진 짝은 하치장에 남겨지고 멀쩡한 짝만 수거되었다. 신발은 두 짝이 함께 있어야 쓸 데가 있는 것인데,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멀쩡한 신발은 잘 세탁된 후 새로운 주인에게 전달되었다. 신발의 새 주인은 한 쪽 다리를 잃은 어떤 소녀였다. 자신의 발에 딱 맞는 예쁜 신발 한 짝을 얻은 새 주인은 그 신발 한 짝과 함께 희망찬 동행을 시작한다.

마르 파봉 글, 마리아 지롱 그림, 《떨어질 수 없어》      


어떤 곳에서는 쓸 데가 없는 사람 취급을 받더라도 또 다른 어떤 곳에서는 100% 이상 쓸 데 있는 사람으로 대우를 받을 수도 있다고 위안을 하며 살아온 지 수십 년이 흘렀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희망처럼 밝은 미래만 열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누구인지 모호해진다. 살던 관성으로 살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나의 '쓸 데'에 대해서 고민이 깊다.  

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은 날도 가끔 있기는 하다. 길 잃은 한 마리 양, 라이언 일병, 화성에 남겨진 마크처럼 존중받는 날은, 아니 존중받는다고 느껴지는 날은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또 쓸데없는 착각을 했군.' 하면서 한숨을 내쉰다. 형편 없고, 볼품 없고, 한심하고, 잘 들여다보면 사악하기까지 한 나는 과연 쓸 데가 한 군데라도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하다.


죽기 직전에 전자제품을 사야 가장 싸게 살 수 있듯이 죽기 직전에 써야 가장 쓸 데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언제가 죽기 직전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나의 오늘의 생각이 너무나 쓸데없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글을 끄적거려본다.


한 마리의 양을 위한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희생도 '쓸 데 있는' 것이 되기를. 내가 어디에 있든 최소한 '쓸데없는' 인간은 아니기를.


숙제를 끝내지 못하고 학교에 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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