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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Jun 03. 2019

됐고

우리 여기 있어요 동물원

나의 형은 나와 두 살 차이가 나고 나의 동생도 나와 두 살 차이가 난다. 우리는 어렸을 때 한 방에서 잤다. 침대는 없었다. 바닥에 요 한 장 깔고 이불 한 장 덮고 셋이 함께 잤다. 는 요의 가운데 눕기 위해 매일 밤 눈치작전을 벌였다. 가운데 누우면 이불 신경 쓰지 않고 무사히 잘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가장자리에 눕게 되면 반대쪽 변방의 형제가 이불을 끌어갈 경우 이불을 내어준 변방의 형제는 추운 밤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다. 가운데 눕기 위해서 오후 다섯 시부터 요를 깔고 누워 있을 수는 없으니 취침 시각이 다가오면 그 눈치작전은 정말 치밀하고 치열했던 것이다. 사실은 나만 그랬다.

취침 시각에 맞춰 요를 깔자마자 가운데 눕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작전은 다른 형제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 눈치작전에서 지면 가장자리에 눕게 되는데, 만약 그럴 경우 나는 이불을 뺏기지 않기 위해 김밥처럼 이불을 몸에 살짝 말아서 깔고 잤다. 편안한 밤을 위해 내가 계획하고 체득한 꼼수였다.


모든 화장품 광고는 예쁘고 피부가 엄청나게 좋은 연예인이 모델로 나온다. 그 모델은 더 이상 화장품을 안 발라도 될 정도로 이미 피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마치 그 화장품을 발라서 피부가 빛이 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꼼수다.

다이어트 제품 광고도 그렇다. 모델은 그 다이어트 제품이 아니어도 이미 완벽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모델은 다이어트 제품 때문에 날씬해진 것도 아니고, 다이어트 제품도 당분간은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모델로 써서 우리 같은 배민(배 나온 민족)을 현혹하는 건 꼼수다.


어떤 회사는 보너스나 복지 혜택이 아주 후하다. 사회 초년생들은 회사의 직원 사랑이 탁월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직원을 사랑하는 회사라면 월급을 후하게 주면 될 텐데 왜 보너스와 복지에 돈을 쓸까. 보너스나 복지는 일단 눈에 확 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월급은 한 번 올리면 회사 형편이 어려워져도 내리는 게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보너스나 복지 혜택은 회사 형편이 좀 어려워졌다고 하면서 줄이더라도 직원들의 심리적 충격이 월급에 비해 크지 않다. 혹시 회사 형편은 어려워지지 않았지만 맘에 안 드는 직원이 있을 경우엔 그 직원에게만 보너스나 복지 혜택을 줄이면 뒷말이 없을 것이다. 꼼수다.


주위 사람들 다 알게 호들갑을 떠는 사람, 힘 있는 사람에게 큰 소리로 아부하는 사람, 안 하던 선물 요란하게 쳐들고 나타나는 사람, 어쩌다 한 번 좋은 실적 내면 스스로 요란하게 공치사하는 사람. 그들이 시끄러운 건 가려진 곳에 뭔가를 숨겼을 가능성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그건 분명 꼼수다.

   됐고

《우리 여기 있어요 동물원》이라는 그림책 어른들이 봐야 한다. 꼼수가 숨어 있다. 많이!

동물원에 사는 사자는 다른 동물들에게 일이 친절하게 충고를 해준다. 홍학, 하마, 물개, 앵무새, 원숭이, 미어캣, 얼룩말, 코뿔소, 침팬지, 돌고래, 수달, 사슴, 기린, 흰곰, 코끼리에게 각각 그들의 처지와 환경에 맞는 충고를 해준다.

예를 들어, 홍학에게는 '꿈은 단지 꿈일 뿐, 현실을 인정하세요. 차츰 삶의 지혜가 생겨납니다.'라고 충고한다. 침팬지에게는 이런 충고를 한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세요. 시멘트 감옥에 갇히면 성격이 난폭해집니다.', 기린에게는 '연애만 하고 새끼는 갖지 마세요. 내 고통을 그대로 물려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마에게는 다른 하마로 교체될 수도 있으니 밥은 챙겨 먹으라 한다. 물개에게는 미움받지 않으려면 사육사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다. 원숭이에겐 쉬어가며 해라, 얼룩말에겐 아이들이 던지는 건 먹지 말아라, 코끼리에겐 힘들지 않은 동물은 이곳에 없으니 적당히 참아내라고 충고해준다. 나머지 다른 동물들에게도 각각의 형편에 맞는 충고를 해준다.


나는 사자가 동물원 원장의 나풀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동물들을 위하는 충고를 한 마리 한 마리에게 맞춤으로 친절하게 해주는데, 그 충고들을 잘 분석해보면 동물들의 희망을 교묘하게 차단하는 꼼수가 들어 있다.


지난날 홍학은 찬란한 날개와 길쭉한 다리를 뽐내며 평원을 휘젓고 다녔던 전력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동물원에 갇혀서 사람들에게 쇼나 보여주는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홍학에게는 드넓은 평원을 다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큰 꿈이 있다. 그런데 꿈은 잊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하면 지혜가 생겨난다고 하는 사자의 충고가 진정 홍학을 위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물원을 무사히 유지하려는 원장의 속셈인지 모호하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충고는 누가 보아도 침팬지를 위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만약 침팬지가 친구들과 계속 싸우면서 난동을 부리면 동물원 원장은 침팬지를 시멘트 감옥에 가둬놓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침팬지를 사람들에게 구경시켜줄 수 없고 결국 동물원의 수익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말 침팬지를 생각한다면 그가 화날 때 두드려 팰 수 있는 샌드백이라도 하나 설치해주어야 할 것이다.

연애만 하고 새끼는 갖지 말라는 말은 기린이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을 이해해주는 듯한 충고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기린이 늙어서 더 이상 제 역할을 못하면 은퇴시키고 청년 기린을 새로 데려오면 그만이다. 새끼를 낳아서 청년이 될 때까지, 즉 출산비와 양육비, 훈련비가 훨씬 더 많이 든다는 걸 동물원 원장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다른 동물들에게도 비슷한 꼼수를 쓴다.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사자는 말한다.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수도 있으니 언제나 두 손 모아 기도하세요.'라고.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백 번 양보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다음번에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또 백 번 양보해서 다음번에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때 일이지 현재와는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번 생은 틀렸으니 쓸데없는 꿈 꾸지 말고 조용히 복종하면서 살아라, 혹시라도 동물원을 탈출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속셈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인 타임>이라는 영화에 이런 얘기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의 남은 시간이 표시되는 디지털이머를 손목의 살갗 안쪽에 장착하고 살아간다. 부자들은 수십만 시간씩 갖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매일 일해서 벌어들인 얼마 안 되는 시간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모든 서비스나 재화는 자신이 갖고 있는 시간으로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비싼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일반 노동자들은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시간을 벌지 못하고, 그래서 타이머의 숫자가 줄어들어 0을 표시하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많지 않은 임금이더라도 만족하며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다 같이 풍족하게 사는 사회란 있어본 적이 없다. 만약 다 같이 풍족하게 살게 된다면 힘들고 difficult 더럽고 dirty 위험하dangerous 무시당하는 diss '4D 업종'은 맡아서 할 사람이 없게 된다. 누군가는 '4D 업종'에서 일을 해줘야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부조리하지만, 누군가는 동물원의 동물 같은 삶을 살아줘야 사회가 유지된다. 동물원의 동물들이 비록 지금은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고 무시당하는 상황이지만, 잘 참고 견뎌내줘야 동물원이 무사히 유지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는 나에게 충고했다.

"조금만 노력하면 잘 살 수 있으니까 성실하게 살아."

그가 뒤돌아서며 혼잣말로 하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탈출은 꿈꾸지 말고 맡겨진 일이나 차질 없게 해라." 

따라가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는 골목을 접어돌더니 금세 사라졌다.

혼잣말로 웅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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