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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Jul 24. 2019

매몰

도서관에 간 사자

걸그룹 애프터스쿨의 나나가 2013년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100 중 2위를 했다는 가십을 읽은 후 '이런 것도 등수를 매기는구나. 근데 아름다움의 등수를 어떻게 매기지? 그럼 1위는 누구?' 같은 질문을 잠깐 했었다. 나중에 1위가 마리옹 꼬띠아르라는 걸 알게 된 건 <얼라이드>라는 영화를 본 후였다. 영화에 여자 주인공으로 나온 마리옹 꼬띠아르는 2013년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1위였던 것이다.


영국군 장교 맥스(브래 피트)는 아내 마리안(마리옹 꼬띠아르)을 살리기 위해 조국을 배반한다. 아내가 스파이인 걸 알면서도.


영화 <얼라이드>의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리안 역을 연기한 마리옹 꼬띠아르의 아름다운 얼굴은 조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내어줄 만하다. 세계에서 1위를 할 정도의 미인이니 말이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나타난 모든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물 중 남자가 여자에게 반하고 여자가 남자에게 반하는 모든 작품에는 반드시 미남과 미녀만 등장했다. <미녀와 야수>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아마 그게 거의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혹시 더 있다면 그 작품은 비참하게 흥행 실패했을 것이다. 

만약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하던 투사들 중 한 명이 자신의 아내를, 그것도 일본제국의 스파이인 게 확인이 된 상태에서 아내를 살리려고 조국을 배반했다면 용서가 될는지. 하지만 남자 주인공이 브래드 피트이고 여자 주인공이 마리옹 꼬띠아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설득의 목표는 이성이지만 그 시작은 감정이다.


브레히트는 독일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이다. 그는 공포와 연민 같은 감정의 이입을 차단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법을 소개했다. 

똑같은 장면을 반복하라고 했다. 그러면 그 순간 관객은 ‘아, 이건 연극일 뿐이지.’라며 정신이 번쩍 들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도 20년쯤 전에는 이런 게 잘 조절이 안 되어 TV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았던 연기자가 시골 장터에 나타나면 일부러 피하거나 찬 물 한 사발을 투척하기도 했다.

무대 에만 있어야 할 스탭이 갑자기 무대 안으들어와서 연기자가 깜빡 잊은 소품을 전달해주고 가는 것도 브레히트가 생각한 기법이다. 낯선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브레히트는 환기(evocation)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나쁜 감정은 내보내고 좋은 생각을 들여보내라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들어 웃거나 울고 있다가는 모든 감정이 배설(catharsis)되어 머릿속이 비어버린다는 것이다.

연기자든 관객이든 환상에 빠지지 말라고 했다. 브레히트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매몰’이다. 감정이 이입되면 매몰되고 매몰되면 비판력은 떨어진다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생각에 근거한다면, 세계 1위의 미녀 마리옹 꼬띠아르가 여주인공으로 나오고, 그 미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남주인공 브래드 피트의 가슴 아픈 이야기는 관객의 감정 모두 빨아들일 뿐 아니라, 부모 자식까지 나 몰라라 할 정도의 정신 못 차리는 을 만들어 나쁜 드라마의 전형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 <얼라이드>를 본다면, 관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 남녀의 변화무쌍한 감정에 계속 끌려다게 된다. 영화 상영 중에는 주인공 남녀가 무사히 살아남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브레히트가 말한)의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비극으로 끝나버린 주인공 남녀에게 연민의 감정을 전부 쏟아놓을 수밖에 없게 다. 남 미녀의 애틋하고 간절한 사랑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현실엔 거의 존재하지 않는 미남 미녀 때문에 현실엔 전혀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매몰되 것이다. 이건 속물적인 게 아니고 인지상정이다. 감정 이입 - 매몰 - 비판력 상실까지 이어지는, 브레히트가 경계한 패턴에 굴복하지 않을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매몰

도서관에 사자가 들어왔다. 도서관 직원 맥비는 관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지만 관장은 도서관에 사자가 들어오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라고 한다. 떠들거나 뛰어다니지만 않는다면 도서관에 들어와도 괜찮다고 관장은 허락한다. 사자는 도서관 규칙을 준수하며 도서관을 이용한다. 어느날 관장이 의자 위에 올라서서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내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치는 것을 본 사자는 황급히 뛰어가서 큰 소리로 직원 맥비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그렇잖아도 사자가 도서관에 들어온 게 마음에 안 들던 맥비는 뛰거나 떠들면 안 된다는 규칙을 어겼다는 걸 사자에게 알려준다. 불가피하게 규칙을 어기게 된 사자는 스스로 도서관에서 나간다. 그 후로 사자는 도서관에 나타나지 않는다. (후략)

《도서관에 간 사자》, 미셀 누드슨 글, 케빈 호크스 그림.


원칙과 예외의 적용 한도를 탄력적으로 조절하지 못하는 건 매몰이 그 원인이다.


관장이 부상을 입는 상황에서도 도서관에서는 뛰거나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원칙만을 강조한 도서관 직원 맥비의 태도가 바로 매몰로 인한 부작용이다.

 

유명한 연예인이나 성공한 어떤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많이 봤다. '지금의 성공이 있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처음에 부모님이 반대한 게 가장 힘들었다.'는 식의 발언 말이다.

부모님이 반대하면 십중팔구는 부모님 말씀에 순종할 것이다. 부모님이 하라는대로, 혹은 부모님이 절대로 반대하시지 않을 만큼 쉬운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그럭저럭 평범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부모님의 반대, 어떨 땐 종교나 전통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고 어려운 길을 선택한 사람 한두 명, 그래서 더욱 어려운 길을 걸어간 사람 중 겨우 1~2%가 성공하는 것이고, 그렇게 10,000명 중 한두 명이 기존의 관습과 권위에 매몰되지 않고 이겨낸 성공신화를 인터뷰에서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이리라.   


나는 스물한 살, 모든 것이 미숙한 나이에 브레히트를 만났다. 매몰되지 말라고 한 그의 말에 매몰되다. 비판력을 가지라는 그의 주장을 무시하기엔 비판력이 너무 부족했다. 정작 좋지 않은 생각과 습관에는 매몰되면서도 가족에 대한 사랑, 공부, 친구와의 우정, 미래를 향한 열정 같은 것에는 매몰되지 못했다.

헛짓 한 거다. 무엇에 매몰되면 안 되고, 무엇에는 매몰되어야 하는지 분간을 못 하는 어중이 짓을 한 거다.


매몰되지 말아야 할 것에 매몰되고, 그래서 비판력이 상실되고, 경직되고, 나약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또 매몰되는 어중이의 오늘이 여전히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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