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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Mar 11. 2019

그것이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무릎딱지

엄마가 죽었다. 엄마의 냄새를 간직하려고 더운 여름날에도 창문을 열지 않는다. 넘어져 상처 난 무릎의 딱지를 아물기 전에 일부러 떼어낸다. 다시 피가 난다. 그러면 살아 있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용기를 주기 위해 격려의 말을 해줄 것이다. 아이는 울지 않으려 애쓴다.   


샤를로트 문드리크《무릎딱지》라는 그림책은 누군가 옆에서 "그림책을 보고 울어?"라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니 혼자 방 안에서 조용히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만약 엄마나 아빠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읽기 전에 남다른 각오가 필요할 거다. 죽음은, 죽은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에게 더 아픔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죽기 직전에 아이는 소리친다. "좀 쉰 다음에 돌아오면 돼. 그때까지 기다릴 거야." 하지만 엄마는 떠난다. "난 이제 엄마 아들이 아니야. 이렇게 빨리 가버릴 거면 나를 낳지 말지. 뭐 하러 낳았어?" 엄마는 초연한 듯 웃고 아이는 억울해서 운다. "흥, 잘 떠났어. 속이 시원해."라고 말하지만 실의에 빠진 아빠가 엄마의 하던 것만큼 자기를 세심하게 돌봐주지 못하는 것에 심통이 난다. 빵에 지그재그로 꿀을 발라서 반으로 잘라 먹는 자신의 식습관을 맞춰주지 못하는 아빠보다 그 방법을 미리 알려주지 않은 엄마가 더 원망스럽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아팠을 때 엄마는 말했었다. "괜찮아. 우리 아들. 누가 우리 착한 아들을 아프게 해? 넌 씩씩하니까 뭐든지 이낼 수 있단다." 엄마의 따뜻한 위로의 말이 듣고 싶어서 무릎에 앉은 딱지가 굳기 전에 떼어내고 또 떼어낸다. 상처가 아물기 전에 딱지를 떼어내면 다시 피가 나고, 그러면 엄마의 위로의 목소리가 들릴 테니까.      


'머리 위에서 천천히 이동하던 해가 막상 지평선에 모습을 숨길 때는 뚝 떨어지는 것처럼 속도를 낸다. 죽음의 그림자도 비슷하게 찾아온다. 죽음은 연습할 수 없기에 어떤 표정으로 맞이해야 하는지도 준비 못한 상태다. 죽음의 고귀함은 한가한 인간들이 내뱉는 환상일 뿐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괴물처럼 느껴진다.'

박홍순, 『나이 든 채로 산다는 것』, 135~137쪽  

   

공간에 대해 연구하고 개념을 정리한 미셸 푸코는 평균, 혹은 규범의 요구로부터 일탈된 행동을 하는 개인들에게 마련해놓은 장소로서 요양소, 정신병원, 감옥, 양로원을 예로 들었다. 런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직역하면 '비정상적으로 위치가 변경된 내장기관'이라고 하는데, 조금 확장해서 해석하면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일탈의 공간'이라고 한다. 푸코는 이어서 말한다.

'우리 사회처럼 바쁜 사회에서는 무위(無爲)도 결국 일종의 일탈이기에, 은퇴 뒤 3주 안에 심근경색으로 죽을 만한 눈치가 없는 모든 사람들의 하는 일 없는 삶 자체가 지속적인 일탈인 것이다.'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16~17쪽     


옛날, 50년쯤 전까지는 장애인이나 노인을 일상생활의 공간에서 단절시켜 수용시설에 격리시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걸로 생각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양로원을 '일탈의 공간'이라고 하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공간이라고 말을 하면 당장 난리가  것이다. '3주 안에 죽을 만한 눈치 없는 사람'이라는 과격한 표현을 쓴다면 그 표현을 쓴 사람이 과격한 방법으로 3주 안에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이 양보해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감옥은 일탈의 공간이라고 해도 좀 이해가 되겠지만 요양소, 정신병원, 양로원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안식처까지 무위(無爲)의 공간이라고 취급해버리면 인터넷에서 수십만 발의 설 총탄에 구멍이 뚫려 매장될지도 모른다. 대부분 자기가 원해서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양로원은 말 그대로 노인들, 특히 본인의 정신과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기거하는 곳인데 그런 공간을 일탈의 공간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푸코가 말했던 양로원에서 일한 적이 있다. 주로 섬망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들을 돌보는 곳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노인 요양원'이라고 부른다. 24시간 내내 침대에서만 생활하는 노인들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신체가 자유로워서 요양원 안에서 자유롭게 다니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즐긴다. 섬망이나 치매도 병이기 때문에 그곳에 계시는 노인들은 엄밀히 말하면 환자라고 해야 하지만 본인은 물론,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그 노인들을 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섬망의 특징은 전혀 다른 세상이 선명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치매의 특징 가까운 과거부터 잊어버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두 증상의 공통점은 몸과 정신이 각기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이 아닌 환상을 보거나, 기억이 쌓여 이뤄진 현실을 송두리째 잊어버리는 것이다. 현실의 아프고 괴로운 기억을 매일 하나씩 지운 후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조용히 잠든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아픈 것이고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행복한 망각 속에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것도 축복일지 모른다.       


중환자가 된 후 죽기 전까지, 즉 죽음을 앞둔 어떤 중환자들은 여섯 가지 상황과 감정에 빠져버린다고 한다. 중환자실 간호사로서 한 경험을 토대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책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에서는 그 여섯 가지를 고립, 소외, 침묵, 분노, 공포, 배제라고 한다. 죽음은 괴물 같지만 누구나 마주쳐야 한다. 그 괴물을 마주치는 것은 철저하게 나의 문제인데 나에 대한 결정에서 내가 배제되는 것은 몹시 서글픈 일일 것이다. 존엄하고 품위 있는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도, 자신의 문제에서 자신이 배제되는 환자를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석양이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직접 마주쳐야 한다면 늙어가면서 서서히 준비를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사 가기 전 서랍을 정리하듯 기억을 정리하는 것이 늙음이고, 정리가 끝나면 이사를 가는 것이 죽음이다. 나의 죽음에 대해서 배제되지 않고 내가 참여하는 죽음, 정리를 얼추 마친 후에 맞이하는 죽음은 차라리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서랍 정리를 미처 다 하지도 못한 채 갑자기 쫓겨나기도 하니까 말이다.

석양이 아름다운 건 그것이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전철을 타고 가다가 옆에 앉은 40대 중반 두 남자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큰 목소리로 태연하게 말했기에 듣지 않으 해도 안 들을 수 없었다. 무더운 8월 1일이었다.

"요즘 아침에 버스에 사람이 없어서 진짜 좋더라. 더우니까 노인네들이 집에서 나오질 않는가 봐."

"그렇겠지. 요즘 같은 폭염에 노인네들은 집에 있어 줘야지. 괜히 돌아다니다가 쓰러진다니까."

노인네들의 건강과 안녕을 무척 걱정주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평소엔 연신내에서부터 노인네들이 잔뜩 타고 나오잖아. 그런데 요즘엔 진짜 더워서 한산하더라."

"노인네들이 버스나 전철을 자기 자가용인 줄 안다니까. 공짜니까 괜히 돌아다녀. 괜히."

"출퇴근 시간에는 노인네들이 좀 집에 있으면 좋은데 아침에 출근할 때부터 노인네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의 뒤통수를 한 대씩 갈겨주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용감하지 못했다. 내 어머니는 내일모레 팔십이고 아버지는 팔십이 넘으셨다. 지금도 버스와 전철을 타고 이곳저곳을 잘 다니신다. 무릎은 좀 불편하셔서 속도는 더디지만.


내 부모님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들도 이십 년쯤 후에는 버스나 전철을 무료로 타고 다닐 텐데 왜 그런 잘난 척을 하는지 모르겠다. 허세도 아니고 오만도 아니고, 눈치가 없는 건지, 게다가 그냥 '노인'이라고 해도 될 것을, '노인네'라는 표현은 노인을 억지로 힘주어 조롱하는 마음씨가 너무나 진하게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늙어서 죽는 이유는 젊었을 때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계청 를 보면 젊다고 낙관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60세 이상 사망자 비율은 2007년에 75.3%, 201681.4%, 2017년에 82.5%다. 일반적으로 65세 이상을 노인이라고 하므로 60~64세 사망자를 대략 빼면 약 70%가 65세 이후에 사망한다. 10명 중 7명 정도가 노인이 되어 사망하지만 나머지 3명 정도는 노인이 아닌 나이에 사망한다. 즉, 단순히 노인이 되면 죽을 나이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은 판단이다. '노인네'보다 먼저 지구를 떠날 '젊은 것들'도 무시 못하게 많은 게 확실하니까 말이다.


죽지 않은 자가 죽음에 대해서 뭘 알겠나. 늙지 않은 자에게 늙음에 대해서 말해주면 이해를 할 수 있겠나. 10명 중 7명은 반드시 늙을 것이고, 늙은 후 죽음이 가까이 오면 그제서야 늙음과 죽음을 조롱한 자신의 젊음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부득이 늙지 못한 3명은 늙어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7년 전 무릎 관절 수술을 받으신 내 어머니의 무릎엔 아직도 수술 자국이 남아 있다. 작은 수술이 아니었기에 지금도 불긋한 자국이 선연하다.


아이의 무릎에 남아 있던 무릎딱지는 오늘은 굳은 채로 남아 있을까, 아니면 일부러 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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