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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Aug 10. 2019

웃다가 울다가

엄마, 잠깐만

철학자 헤겔이 변증법을 생각해낸 건 참 잘 한 일 같다. 조금만 관대하게 라보 모든 역사변증법으로 설명이 된다. 정(正)의 시간이 이어지면 반드시 반(反)이 나타난다. 정과 반이 충돌하고 갈등하다가 합(合)이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간다. 변증법은 모두만족할 만한 대안을 찾는 것이다. 겔은 그 대안 절대정신이라고 했고 그 본질 '자유'라고 했다. 사란 자유가 전개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역사의 한 조각인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도 자유를 얻기 위함이라 할 수 .


장대한 역사의 흐름뿐 아니라 우리의 작은 삶에도 변증법은 공기처럼 스미어 있다. 결혼 초에는 수시로 싸웠지만 이제는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여 서로 존중하며 사는 우리 부부의 삶도 변증법이 작용했다. 카페에 가서 대화하자는 의견과 노래방에 가서 노래하자는 의견으로 친구들끼리 대립하다가 노래방에 가서 대화한 경우도 있다. 조용해서 대화가 더 잘 됐다. 작지만, 우리 자유를 얻은 것이다.


《엄마, 잠깐만》이라는 그림책은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전철을 타기 위해 분주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엄마는 전철을 놓칠까봐 분주히 움직이는데 아이는 전철보다는 주변 상황에 더 관심이 많다. 지나가는 강아지, 도로 공사하는 모습, 공원에서 오리에게 식빵을 나눠주는 아저씨, 아이스크림 가게, 물고기가 헤엄치는 수족관, 꽃에 앉은 나비에게 관심을 보이느라 자꾸 멈추게 된다. 엄마는 그때마다 빨리 가자며 아이의 팔을 자꾸 잡아끈다. 전철역에 도착하기 직전 소나기를 만난다. 가뜩이나 시간이 없는데 비까지 와서 엄마의 마음은 더 초조해진다. 전철이 막 떠나려는 순간 엄마에게 끌려 뛰어가다가 또 멈춰서는 아이가 발견한 무지개 때문에 엄마와 아이는 전철을 놓치고 만다. 이미 떠난 전철 대신 엄마는 아이의 ‘잠깐만’ 소리를 들어준다. 아이가 가리킨 곳에 화려하게 펼쳐진 무지개를 감상하며 엄마와 아이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엄마는 말한다.

“그래. 우리 잠깐만 ···.”


잠깐의 자유만으로도 분히 행복할 수 있다.

   

나의 형은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 반드시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치지만, 코미디 프로그램 아니고 누가 봐도 웃기지 않을 만한 장면에서 심심찮게 낄낄거리고 웃는 형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형은 나보다 좀 더 순수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형이 웃을 때마다 텔레비전의 그 장면이 과연 웃을 만한 장면인가, 도대체 웃음을 주는 인이 뭔가, 왜 나는 웃기지 않은데 형만 웃는 걸까, 좀 더 확실하게 웃기는 요소를 집어넣어 제작을 했다면 나도 웃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옛날엔 형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으면 나는 괜히 더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을 남발하는 형에 대한 반발이었다. 겔의 변증법을 어린 나이에 나도 모르게 적용해본 것이다. 자유는 얻지 못한 채.


형은 어떨지 모르겠다. 나는 요즘 텔레비전을 보다가 가끔 눈물을 흘린다. 드라마는 물론,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운 적이 있고, 심지어 동물들만 나오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사냥감이 없어 황야를 배회하는 맹수를 보고 운 적도 있다. 우울증은 아니다. 남자가 중년이 되면 여성 호르몬이 많아져서 그런다고들 하기에 그러려니 하면서 살고 있다. 

어디인지 모르는 낯선 곳으로

내가 그렇게 되기 시작한 건 내 아들이 초등학생이었을 때였던 것 같다.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앞을 이른 아침에 지나가다가 본 장면 때문이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운동장에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 날은 운동회가 있는 날이었다. 펄럭이는 만국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국기 펄럭이던 나의 초등학교 운동회 날이 생각난 걸까.

눈물이 흘렀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느날 김건모의 노래 <잘못된 만남>의 가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친구에게 소개시켜준 나의 연인이 언젠가 그 친구의 연인이 되어버렸다. 그제서야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 때는 이미 늦었고, 결국 사랑과 우정을 모두 버려야 했다.' 

눈물이 흘렀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 옛날 텔레비전을 보면서 키득거리던 형의 푼수 같은 모습이 싫어서 일부러 웃음을 참았던 내가 지금은 별것도 아닌  훌쩍거리고 있으니, 이런 푼수 같은 나의 모습을 형이 본다면 뭐라고 할지.           


그렇게 웃다가 울다가,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헤겔이 생각해낸 변증법 때문에, 어쩌면 변증법이 아니더라도, 어디인지 모르는 낯선 곳으로 또 걸어가는 자신을 조만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날, 눈물이 흐를 것이다. 아직 자유를 얻지 못한 우리의 미숙함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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