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회사에 들어왔다.
회사 규모도 작아졌고, 페이도 작아졌었다. 직무와 산업 역시 처음 접하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위축되거나 실망에 빠져있지는 않았다.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을 것이라는 면접 때 들었던 말도 힘을 주었다.
입사하는 날 바로 기안을 쓰라는 지시가 있었다. 대기업에선 생각보다 기안을 그렇게 자주 쓰지는 않는다. 특히 기획팀이라면 보고서를 많이 쓰긴 쓰지만 그것이 기안의 형태로 올라가는 일이 하루에도 3,4번 있지 않다. 대부분의 보고서가 팀 단위로 작성하는 50~100 장 이상의 파워포인트 보고서이고, 2주에서 1달 정도 걸리는 작업들이기 때문에 완성된 결과물은 보고서이며, 그 보고서를 축약한 기안문은 간결하다.
하지만 이 곳은 달랐다. 회사가 어려움을 겪어서 그런지, 과거 직원들의 정보 공유가 안 되어있고, 의사결정의 책임소재를 확실히 하고자 기안이라는 걸 사소한 건에 대해서 무조건 올려야 하는 구조였다.
처음 오는 곳이지만 그래도 나름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깨달은 건 내가 속한 팀에 너무 많은 일이 몰려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한 번 크게 꺾인 회사라서 남은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개인에게 일이 몰리는 걸 이해할 수 있었지만 왜 우리 팀에 앞단과 뒷단의 모든 일이 몰려있었고, 그걸 챙겨야 하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굉장히 놀랬다.
물리적으로 멀티태스킹을 하면서 할 수준이 아니었다. 전임자가 밤새면서 초인처럼 했다고 했지만 이미 펑크가 난 경우도 있었고, 전임자 역시 전 전임자에게 제대로 받지 못해 맥락이 끊기고 과거를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건 나의 상사였다. 물리적으로 팀원들이 다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면 다른 팀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해서 일을 쳐내야 하는데 일은 오히려 늘어갔다.
그리고 다른 팀과 업무 분장으로 의견이 갈리면 우리 팀을 지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팀이 해야 한다고 일을 더 받아왔었다. 물론 이게 왜 잘못인가 라는 관점으로 생각해본 적도 있다. 일을 더 많이 하고 각 팀원들이 자신의 역량을 쌓게끔 일을 더 해서 역량이 늘어나면 좋을 수도 있다고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역량이 늘었다기보다는 그냥 회사 일 더한 거지만.
그래도 이건 회사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 회사가 직원들이 퇴사할 때 지급해야 하는 퇴직금을 위한 충당금을 쌓지 못하는 상황인데 실제로 매달 문자로 퇴직연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라고 은행에서 오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려 일을 받아온다는 것은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팀이 할 수 있는 핵심 역량에 집중해야 하는데, 8개월 동안 계속 같은 상황이었다. 나도 그 8개월 동안 그렇게 기여를 많이 할 수 없었고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떠나가고 있었다. 나 역시 떠나가려 노력을 많이 했지만 예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예전엔 서류는 통과하고 면접에서 떨어졌다면 지금은 서류 자체도 통과를 못 했다. 내 이력서에 최근 회사의 이름이 바뀌면서 일어난 결과이다.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프로 야구단이 있는 회사의 기획팀 타이틀에서 이제 사람의 기억 속에서 잊힌 재무적으로 힘든 회사의 타이틀이니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갈 곳이 여기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생각을 할 법했다. 당시 3개의 합격한 회사 중 사람을 보고 가겠다는 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계속 업무를 잘해보려 했지만 신기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팀장으로 왔다는데 보고서를 잘 써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고, 엑셀 파일을 공유해주는데 수식을 보여주기 싫어서 값 복사를 해서 공유하는 것도 겪었다. 또한 회사에서 오고 가는 이메일에 굉장히 강압적인 어조가 쓰여 있는 것도 목격했다. 회사에서도 상대적으로 힘이 더 있는 팀이 있기 마련이지만, 내가 너보다 위에 있다는 의도를 이메일에 강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미팅을 하던지, 회식을 하던지 이럴 때 나타나지. 하지만 이메일만 봐도 이 사람이 얼마나 자기가 강력한 위치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나중에 이 사람과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 나의 퇴사의 가장 큰 단초가 되었다.
결국 나의 마지막 회사생활은 짧게 끝이 났다. 1년 약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내가 한다고 했지만 도움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고, 나 역시 이 회사를 입사하면서 앞서 내가 가진 커리어가 퇴색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Win-Win은 최소한 아니었다. 회사의 크기에 따라 전혀 다른 직장생활이 펼쳐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시야, 내가 생각해야 하는 수준의 깊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다양성과 책임 이 모든 것이 다 달랐다. 어떤 건 큰 회사가 더 괜찮았고, 저런 건 작은 회사가 더 괜찮았다. 각자의 장단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회사를 선택할 때 재무안정성을 보고는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재무안정성이 무너진 회사는 조직원의 신뢰도 무너져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일단 경영이 다시 안정화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 상처 받은 사람들은 다들 떠나고 상처 받지 않은 새로운 사람들이 와야 신뢰가 회복되고 다른 조직문화가 형성될 확률이 크다. 사람의 피부에 상처가 생기면 딱지는 떨어져 나가고 새살이 다시 나듯이.
퇴사 서류를 내면서 내가 이제 회사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거의 접었다. 스탭 조직에 일하면서 스태프의 한 부분이었던 직장인이 그 조직의 이름을 능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신사업이나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낸 팀의 수장 정도나 되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어떤 회사의 무슨 팀의 누구누구 일 뿐이다. 그 당연한 걸 겪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고, 회사 내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이라도 울타리를 벗어나면 한 명의 개인일 뿐이고, 한 번 나간 울타리를 다시 들어간다는 건 어렵다.
일단 나는 개인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고, 어차피 언제 가는 누구에게든 올 순간이니 미리 적응하자라는 생각으로 퇴사를 다시 했다. 큰 울타리에 못 들어가면 나만의 작은 울타리를 만들자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