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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료했지만 아직 훈련병입니다.

by 고채윤



수료식의 기쁨도 잠시 후반기 없이 자대로 바로 간 동기들은 바로 군생활이 시작이 됐고

후반기가 남아있는 사람들은 아직 훈련소에 남아 좀 더 교육을 받아야 했다.


박격포는 2주 동안 받아야 해서 그동안 지낼 다른 훈련소로 옮겨 갔는데

그때부턴 병조교들과 일반 간부들이 교육을 했고

생각보다 빡세게 잡지는 않았다.


7주 동안 정든 얼굴을 떠나보내고 다시 새로운 얼굴들과 마주 앉아

입대첫날처럼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남자들끼리 이렇게 구체적으로 물어가면서 얘기하는 것도 군대가 다들 처음일 것이다.


박격포도 종류가 3가지가 있는데

60mm, 81mm, 4.2인치 박격포가 있다.


난 81mm를 배정받았는데 나중에 장비들을 들어보니

하나하나가 생각보다 좀 무게가 있어서 내심 놀랐다.


모두가 이 생소한 물건이 처음이다 보니 조립하는 법 다루는 법 등 처음에 다들 우왕좌왕했다

그래도 땡볕에서 몇 시간 하다 보니 쉬고 싶어서라도 다들 금방 익히게 되는 마법이 일어났다.


박격포를 하면 모든 포지션이 중요하긴 하지만 조준의 기준을 잡는 겨냥대를 박아야 하는 탄약수 역할이 중요하다.

왜 이 얘기를 하냐면 주로 탄약수는 막내들이 제일 많이 하기 때문이다.

즉 이 훈련이 끝나고 실무 가면 몇 달간은 기다란 막대기 들고 계속 뛰어다녀야 한다는 얘기다.


생각보다 하는 일은 단순하다

막대기 두 개를 들고 멀리 뛰어간다 그리고 기준점을 잡는 포수를 바라보면

탄약수에게 주는 사인을 보고 이동해서 그대로 땅에 박아버리면 끝이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단순하지만 땅에 박는 게 생각보다 정말 쉽지 않기에

방향을 다 맞춰놔도 땅에 박는 순간 다 일그러져 버린다.


후반기의 장점이라 하면 밥 먹을 때 먹고 싶은 만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근데 정말 밥만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었다.


인기 있는 반찬 같은 경우는 금방 없어지기 때문에 한국자로 정량을 정하고

가끔씩 제육이 나오면 국물만 더 펄수 있게 해 줬다.


그래서 앉으러 가는 길에 식판들을 보면 각자 하얀색 산을 쌓아놨다.


그리고 또 하나는 종교활동이었다.

몸이 지친 와중에 쾌적한 건물에 들어가서 나눠주는 간식들이 그때는 어찌나 소중하던지.

다들 한입 먹을 때마다 무슨 미슐랭 먹듯이 음미하며 먹는다.


2주 동안 이러한 과정들이 똑같이 반복이 된다.

막대기 들고뛰고 움직이고 땅에 받고 그러다 시간 되면 밥 먹으러 가서

밥만 가득 쌓아서 먹고 그리고 다시 뛰어다니면서 소화시키고 무한 루프다.


그래도 그 틈에도 동기들과 저녁에 자기 전 나누는 농담들, 배급받은 건빵으로 게임하고

불침번 서고 사실 정말 특별하게 없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이제 후반기마저 교육이 끝나면 그날 김포와 섬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 준비해서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출발을 한다.


아직도 그날이 기억난다.

서울에 도착해서 한강을 지나갈 때 날씨가 흐릿해지고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그땐 내 군생활의 시작이 불안하다 생각했었다.


사단에서 여단으로 구분하고 또 여단에서 대대로 구분을 한 다음 각자 미니버스를 타고 헤어졌다.

이제 내가 지낼 부대에 도착해서 인사과 간부와 병을 따라가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무한 대기가 이어졌다.


우리는 바로 생활반에 들어가기 전에 적응기간을 가지라고 3일 동안 동기들끼리 지내면서 동화교육을 받는데

사실 교육이랄 건 없고 동기 2명과 생활반에서 자유시간처럼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사실 동화교육 이래서 간접체험처럼 뭔가를 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해서 의외였다.


이 기간에는 다른 선임들과 접촉을 최대한 못하게 해서 샤워도 소등하고 난 뒤에 할 수 있는데

그때 다른 선임병 한 명이 야간근무가 끝나고 샤워 중이었다.

그 선임병이 내 맞선임이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우리의 병과를 묻고 중대를 묻더니

나에게 내가 니 맞선임이야 인마!

이 한마디를 남기고 나갔다.


그렇게 우연한 만남이 끝나고 동화기간도 끝나자

각자 중대로 흩어져서 생활반에 들어가게 됐다.


일단 맞선임과 맞맞선임이 내 꽃봉(더블백)을 풀어서 정리와 빨래를 도와주고 앞으로 지켜야 할 사항들을 알려주었다.

군대에선 속옷, 디티(디지털 티셔츠) 개는 법도 다 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려운 것도 없었는데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잘 안 됐는지 모르겠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안다 하더라고 실수투성이인 이등병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동작하나 말 하나로도 하루 종일 혼날 수 있는 군대이기에 어디 갈 때마다 나에겐 지뢰밭이었다.


군생활이 줄어들면서 이병생활도 거의 한 달 정도로 줄어들었고 난 후반기까지 받았기에

한 달도 안 돼서 일병이 됐다.

근데 오히려 안 좋은 점은 이병 때 뭔가를 익히고 일병이 돼야 하는데 거의 들어오자마자 진급을 해버리니

모든 걸 빨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장점을 찾아보라 하면

내 실수만으로 혼나도 된다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실수했을 때 나만 혼나고 끝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모르고 있었다.

맞후임이 들어오기 전까지 말이다..


이병, 일병이라는 계급장을 달아도 아직까진 나에겐 훈련병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훈련소에서 모든 걸 배웠다 생각했지만 또 다른 훈련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훈련소에서는 군인이 되기 위한 훈련이었다면

실무에서는 이 계급조직에서 계급에 맞게 행동하고 암묵적으로

내가 의무로 해야 할 일들을 다시 익혀가는 시기였다.


그렇다.

난 훈련소를 수료했지만 아직도 훈련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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