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잠시 우리는 바쁘게 돌아가는 국방부의 시계에 맞추기 위해 다시 돌아갔다.
당시 훈련소에 시계와 달력이 없었는데 그것 때문에 가뜩이나 안 가는 시간이 더 안 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시간은 모르더라도 수료식 날짜를 세기 위해서 각자 손으로 그려서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주를 다 색칠할 때마다 괜히 뿌듯하고 고지에 다 와간다는 기분이었다.
각 주차별로 여러 가지 훈련을 하는데
행군, 사격, 유격, 수류탄, 막타워 훈련 등 그 짧은 기간 안에 정말 무슨 패키지처럼 짜여 있어서
언제 이걸 다 하지 싶다가도 정신없이 일어나서 밥 먹고 훈련받고 씻고 자고 나면 어느샌가 하나씩 해내고 있었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야했는데
밤동안 환자는 없는지 혹시나 나쁜 행동을 하는 동기는 없는지 체크하기 위해서
화장실 입구와 중앙복도 등 무전기를 들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미처 이름표 바느질 못한 동기들은 들키지 않기 위해
잘 보이지도 않는 취침등에 의존해서 열심히 바느질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화장실 들어간 친구가 5분 이상 안 나오면 꼭 노크하면서 체크를 했어야 했다.
왜 그렇게 변비가 심한 애들이 많은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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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즐거움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거 같은 훈련소에서 우리들의 유일한 행복은 인터넷 편지를 받는 거였다.
아쉽게도 해병대는 하루에 한 명만 쓸 수 있게 돼있어서 타군에 비하면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유일하게 모두가 그 순간만큼은 행복 속에 머물렀다.
나도 훈련기간 중에는 그 인터넷 편지들이 많은 힘이 돼서
배급받은 훈련노트에 끼워 다니면서 들고 다녔다.
기억에 남는 훈련들이 몇 개 생각이 난다.
막타워라는 11미터 높이의 타워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인데 입구에 딱 서는 순간 그들의 본 모습이 다 들어난다.
무서울게 없고 가오가 몸을 지배하는 동기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면 새가슴을 가진 친구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화생방
내가 경험하기 전까지 화생방의 냄새는 뭐가 지독 할 것이다였는데
막상 겪어보니 지독한 것보다 그냥 냄새가 아프다는 기분이었다.
방송에서 왜 그런 반응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해병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다 아는 천자봉
우리가 수료를 하기 전에 필수로 거쳐야 하는 단계다.
천자봉 등반을 하기 위해 밤 12시에 출발을 했는데 훈련소 앞 연병장에 무장한 채로 소대장님의 설명을 듣고 소대 깃발을 들고 출발을 하니
그때만큼은 마음이 괜히 웅장했었다.
아무도 없는 새벽에 모두가 무장을 메고 산으로 향하니 뭔가 재밌으면서도 그 순간에는 내가 그동안 상상하던 군인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생각한 천장봉 등반은 정상에 올라서 공기도 좀 마시고 그 순간을 느끼는 건 줄 알았는데 그냥 가자마자 단체사진 찍고 바로 하산이었다.
생각보다 허무하긴 했지만 그렇게 내려와서 복귀하는 길에 선임 군악대와 간부, 선임들이 박수를 쳐주면서 환영을 해주니 모두가 자신이 끝까지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으로 들어왔다.
몸은 지치고 날씨는 더워 죽고 얼른 씻고 싶지만 이제 우리가 고대하던 시간이 다가왔다.
드디어 빨간 명찰을 수여받는 것이다.
대부분 해병대에 중에는 이 빨간 명찰을 보고 입대한 애들도 꽤 많다.
그러니 그동안 말로만 듣던 그 빨간 명찰을 맨날 소리치고 혼내던 소대장들이 따뜻한 말 한마디와 가슴에 붙여주니
그때의 기분은 사회에서 느끼던 기분과는 다른 종류였다.
이제 천자봉도 끝났겠다.
훈련의 거의 모든 게 끝났기에 소대장들도 더 이상 우리에게 윽박지를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그리고 소대장과 함께하는 특별 다과시간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그냥 군인정신에 정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다과회 때 얘기할 때는 세상 스위트한 사람들이었고 유머러스했다.
그리고 어느 집단을 가든 광대역할을 사람이 있듯이 역시나 소대장 성대모사를 하며 재롱을 부리는 동기 덕분에
분위기는 한층 더 수료식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점점 수료식이 다가오면서 철없는 20대 남자애들 모습에서 조금은 군인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수료식에서 부모님과 친구들을 볼 생각에 다들 없는 머리카락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 쓰고 자기 전 운동하면서 관리를 시작했다.
더운 여름날 큰 연변장에서 수료식을 연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좀 움직이면 모를까 같은 자세로 오래 서있는 건 꽤나 고된 일이었다.
수료 전에 중요한 게 아직 두 개가 남아있다.
바로 내 실무지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어떤 병과로 가게 되는지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둘 다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해병대에는 크게 포항 그리고 김포 그 외 연평도, 백령도, 제주도가 있다.
이 중에서 모두가 젤 가기 싫어하는 곳이 연평도와 백령도인데
아무래도 외진 곳에 있는 섬이다 보니 휴가를 나올 때도 거의 하루를 날리고
들리는 소문이 다른 부대에 비하면 좀 더 힘들기 때문이다.
경상도에 살고 있던 나는 포항을 기대하다가 그냥 섬만 걸리지 말자라고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 대망의 실무지가 발표되던 날 모두가 대학발표 기다리듯이 눈을 바짝 뜨고 결과지를 받았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 근무지를 확인했는데 각자의 반응만 봐도 어디로 가는지 다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난 김포로 걸렸다.
집이랑 좀 멀긴 해도 김포정도면 아주 양호한 편이었다.
이렇게 자대를 배치받고 이제 우리는 대학으로 치면 어디 전공으로 갈지를 정해야 했다
그중에는 기본보병부터 통신, 전차, 감시장비병 등 종류가 다양했는데
난 기타를 쳐야 해서 손을 아껴야 된다는 생각에 경쟁이 심한 감시장비 종류로 1,2,3 지망을 다 넣었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인가?
결과는 뜬금없이 박격포병이 됐다.
내가 지원한 병과에서 다 떨어지고 랜덤으로 박격포병으로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안 가야겠다 생각한 병과를 이렇게 들어가게 되다니 인생은 알수 없다는걸 다시 느꼈다.
그리고 같은 병과 동기들을 만났는데 생각보다 멋있다는 이유로 1 지망을 쓴 애들이 많았다.
후에 자대에서 만났을 때 후회한 사람 꽤 많았다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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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렇게 하나 둘 훈련소의 기간이 마무리되면서 우리의 수료식도 눈앞까지 다가왔다.
미리 받아둔 정복을 입고 서로서로 옷매무새를 다듬어준다.
그렇게 마지막 정리를 하고 훈련소 앞에 정렬해서 소대장님들의 지휘에 맞춰 우리 가족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연병장으로 향했다.
7주 동안 지겹도록 받았던 그 제식훈련들을 그날에서야 빛이 나는 거 같았다.
마침 우리 기수 때가 코로나 이후 첫 대면수료식이라 기대도 많았다.
그래서일까 날씨마저도 이를 축하하듯이 화창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훈련병들은 연병장에서 해병대박수를 치면 군가도 부르고
지금까지의 받은 훈련의 고생을 돌려받고 있었다.
하지만 수료식이 끝났다고 해서 우리들은 바로 가족에게 갈 수 없다.
제자리에서 가족이 와서 터치할 때까지 가만히 서있어야 했다.
터치를 받으면 그제야 부모님께 첫 신고를 하고 우리들만의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개인사정으로 가족이나 친구가 오지 못해 가만히 서 있는 동기들은 모두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이런 경우는 소대장들이 다 모아서 같이 밥을 먹는다고 한다.
그렇게 각자 외출을 나가면 주로 식당을 가거나 펜션을 잡아서 음식을 해 먹는데
모두 그동안 사회의 음식이 그리웠다는 것을 알기에 소대장들은 제발 과식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과거에 과식했다가 실려간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흡연자들 같은 경우는 7주 동안 강제 금연을 당했기 때문에 끝나자마자 담배부터 해치워버린다.
세상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하지만 외출은 정말 몇 분도 아니고 순간처럼 느껴졌고 나도 복귀하는 순간에는 입대보다 더 가기 싫었다.
차라리 바로 자대를 갔더라면 덤덤했을지도..
수료식이 끝난 당일 훈련소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그날만큼은 서로 수다를 떠느라 잠도 제대로 안 잤던 것 같다.
그렇게 다음 날 맨날 훈련병이랑 부르던 방송이 이제는 수료했다고 해병으로 바뀌어서 방송이 나왔다.
그땐 그게 그렇게 좋았는지 서로 해병이라고 축하를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본보병으로 가는 동기들은 바로 오전에 출발을 해야 했기에
이별을 해야 했다.
7주 동안 서로 부대끼면서 뒹굴고 씻고 자면서 정이 많이 들었는지 다들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참 묘했다 단조로울 것만 훈련소에서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느낄지 몰랐고 같은 웃음, 눈물이어도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훈련 초반에 저녁에 자다가 단체로 연병장에 나가서 얼차려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제일 무서운 소대장님이 한 말이 기억난다.
“인생을 살면서 지금 이 7주는 정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짧은 순간이겠지만
이 짧은 순간들이 너희들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다주면 좋겠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지금도 살아가면서 군대에서의 버틴기억,힘들때마다 어떻게든 버텨서 한 경험들이
치열한 사회에서 적응하는데 도움이 된 건 맞다.
자 군대가 이렇게 감동적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에겐 아직 후반기가 남아있고 진짜 군대생활을 하는 곳인 실무로 출발하지도 않았다.
나의 군돌이는 100프로 중에 이제 7프로가 됐다.
그렇다 난 아직도 훈련소에 2주나 더 남아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