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훈련소에서의 하나부터 열 가지는 모든 게 새로웠고 낯설었다.
말하는 법부터 심지어 걷는 것까지 통제당하고 세면도구를 어느 손에 들어야 하는지도 통제했으니 말이다.
즉 우리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거라곤 꿈속에서 활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꿈에서의 시간은 야속하게도 너무 짧았다.
초반에 많은 훈련병들이 헷갈려하는 게 복명복창이라는 것인데
예를 들어 소대장이 “지금 당장 자리로 돌아가” 이렇게 말했다면
우리도 ”예 지금 당장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복사해서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도 모든 게 처음이라 복명복창을 까먹고 그저 큰 목소리로 “예 알겠습니다”만 외쳤다가
얼차려를 꽤 받았다.
훈련소라는 곳은 짧은 기간 안에 민간인을 군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장소이기에
그만큼 많은 변화와 통제를 요구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여유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난 5월 군번이라 본 훈련은 6월에 받았는데 정말 날씨가 안 더운 날이 없었다.
매일 저녁 샤워를 하지만 사람은 많고 군대에는 정해진 일과 시간이 있기에
그 시간과 일정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은 한 개의 샤워기를 3~4명이 같이 썼다.
만약 1분이라도 시간을 넘긴다면 우린 그대로 얼차려 행이었다.
그동안 집에서 30분 1시간씩 샤워를 하던 동기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거고
앞으로 수료할 때까지 이렇게 씻어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한 동기도 몇 명 있었다.
우리가 서러움을 느낄 때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나는 밥 먹을 때라고 생각한다.
해병대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공평하게 정량배식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아직 개봉하지 않은 반찬과 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량의 밥과 반찬을 받고 더 받을 수도
더 먹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더 충격이었던 것은 우리에게 음식을 남기지 말라고 가르치던 군대가 개봉하지도 않은 밥과 반찬을 그대로 짬통에 버리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더 먹으면 다른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나를 포함한 모든 동기들은 수료할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혹 정말 배고픈 친구들은 짬통 맨 위에 있는 부분을 몰래 먹다가 걸려서 된통 깨진 적도 많다.
해병대에선 “통영관”이라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각 자리별로 천장에 TV가 달려 있다.
항상 해병대에 관한 같은 홍보영상이 쉬지 않고 나오는데 진짜 4주 차쯤 될 때쯤엔 세뇌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라는 기분도 든다.
지금은 훈련소에서 휴대폰을 쓰는 게 가능해졌지만
불과 내가 입대했을 당시에만 해도 공중전화를 사용했다.
2주 차 주말쯤이었던 것 같다.
드디어 소대장이 오늘은 전화를 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방송을 했다
모두가 그날만큼은 설레고 긴장되는 날이었다.
비록 우리가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은 3분 정도였고 길면 5분이었다.
사회에서는 별말 안 해도 흘러갈 시간이지만 군대에서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다른 가족 친구들과도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말 모든 상황이 애절했다.
나조차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을 노트에 대본처럼 적어서 준비했으니 말이다.
밖에서 소대장은 초시계를 들고 시간을 재고 있고 혹여나 가족이 전화를 안 받으면 온갖 걱정이 든다.
사회와 떨어진 지 고작 2주지만 체감은 몇 년이었고 그날 저녁은 숨죽인 흐느낌만이 가득했다.
걸음걸이, 손동작 하나, 말하는 법, 세면시간, 밥 먹는 시간, 전화까지 우리가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해 왔던 일상 속의 평범함이
여기선 하나도 평범하지 않았다.
우린 새로운 세계에서의 평범함에 적응 중이었고 원래 있던 평범함은 다시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우리가 누린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감사함을 느끼고 소중함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렇다 철이 들고 있었다.